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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이재춘(증언자-이효선)
이름: 관리자
2021-09-17 12:51:10  |  조회: 177
190425A 이 재 춘 ( 李在春)

생년월일: 1909년 4월 1일
출생지: 강원도 원주
당시 주소: 서울 혜화동 15의 27
피랍일: 1950년 7월 4일
피랍장소: 자택
직업: 종이공장, 운수업
학력/경력: 사회사업가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5남 3녀
외모/성격: 체격이 좋음 / 순하고 착한 성품

증언자
성명: 이효선(1941년생)
관계: 3남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원주 토착 좌익들이 들이닥쳐 무기를 내놓으라며 납북자의 동생인 대한청년단 활동을 한 이재경을 찾다
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납북자를 끌고 감.
• 지역 유지로 6·25전쟁 전 북한에서 월남한 난민들을 위하여 집 열다섯채를 지어주었고, 남동생 이재경
이 지방 좌익들을 근절하기 위한 대한청년단 활동에 적극 가담하였음.
• 당시 국립도서관에 수감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 달 정도 매일 가 보았는데 어느 날 그 앞에 여러 대의
차량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수백 명의 납북자들이 포승줄에 묶여 나오는데 거기에서 납북자를 발견하여,
달려갔더니 걱정 말라고 동생 재경이도 자수하라고 함.

직업 및 활동
<6·25전쟁 전 원주에 살 때 지역유지로 북한에서 월남한 난민들을 위하여 15채의 집을
지어 희망촌 마을 설립. 서울에서 종이공장과 운수업을 하였음.>
문_ 아버님은 무슨 일을 하셨나요?
답_ 1946년에 원주에 봉산교라고 일명 ‘쌍다리’라는 다리가 있었어요. 다리가 두 곳이
있었는데, 그 밑에 북한에서 월남 온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이런 곳에서 월남한 월남
민들이 가마니를 치고 살고 있었어요. 저희 외할아버지도 강원도 인제에서 공산군이 들
어오면서 땅을 다 뺏기고 원주에 와 계셨죠. 그러니깐 장인 장모를 모시고 있었죠. 저희
아버님이 그 당시에 원주에 유지셨어요. 그래서 다리 밑의 상황을 보시고, 거기 원주 초
등학교인지, 일산 초등학교인가 하여튼 초등학교 후원 회장을 맡고 계셔가지고 원주 농
고 학생들과 초등학생들이 조약돌 같은 걸 주워다가 지반을 깔고 집을 15채를 지어주셨
어요. 그리고 각 동에다가 두 세대를 입주시켜서 30세대를 도와주고, 생활비를 주면서
희망을 가지고 살라고 그 마을을 1946년에 희망촌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서울로 오셨
어요. 서울에 오셔서 그때 저희 아버님이 남대문에 조그마한 종이 공장과 운수업을 하고
있었어요.

납북 경위
<원주 토착 좌익 세 명이 집으로 들이닥쳐 처음에는 무기를 내놓으라고 하며 납북자의 동
생인 이재경을 찾다가 무기와 이재경이 없는 것을 확인 한 후 아버지를 끌고 감.>
문_ 어떻게 납북되셨는지요?
답_ 7월 4일 집에서 아버님하고 온 가족이 문을 걸고 있었는데 오후 4시경 아버님은 차
고 겸 정원이 있는 정원에 계셨어요. 그때 이제 원주에 있는 토착 좌익들 세 명이 우리
집에 급습해서 들어왔죠. 원주에 있던 좌익들이 서울까지 와서 우리 집을 급습해가지고
큰누님이 모르고 손님 왔다고 문을 열어 줘 가지고 들어왔어요. 내가 그때 열 살이었는
데, 거기 두목처럼 보이는 사람하고 우리 아버님이랑 악수를 하면서 아버님이 고생하셨
습니다 하는 거 보니까 아마 감옥에서 막 나온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이 우리 집에 들어오
면서 제일 먼저 무기를 내놓으라고 했어요. 얼굴을 아는 것 같았어요. 그러고서 그 사람
들이 들어와 가지고는 아버님의 상황보다는 숙부님, 우리 아버님이 두 형제였는데 ‘이재
경이 여기 있느냐?’ 하고 물었어요. 숙부가 없는 거를 확인하더니 가자 그래 가지고 그
대로 아래위에 흰 모시적삼 여름 옷 입으신 채 바로 끌고 가더라고요.
문_ 완력을 사용해서 가자고 한 건가요?
답_ 완력이죠. 아버지는 순순히 응하셨는데 우선 무기를 내놓으라고 하니까. 내가 어렸
을 때도 부르주아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랬더니 우리 어머님이 우리가 무슨 무기가
있느냐, 무기라고는 부엌에 있는 식칼밖에 없다고 그러고선 서로 막 옥신각신 하는 것을
들었죠. 그래 가지고 그 세 사람들이 연행을 해가지고 가는데, 그 혜화동 로터리하고 우
리 집이 지금의 장면(張勉) 총리, 장면총리 집이 아마 기념관으로 남아있는데, 그 맞은
편이였는데 그 사이까지 나와 우리 형제들이 따라갔는데, 우리가 팔남매인데 형들이랑
따라가면서 아버지가 시계 찼던 걸 형한테 주면서 어머님한테 가 있으라고 그런 얘길 들
으면서 우리가 따라간 기억이 있어요.

납치 이유
<대한민국 자유 민주 지지 우파 재력가로 월남인들을 앞장서 도와준 것과 토착 좌익 공산세력
을 근절시키기 위한 청년단 활동에 적극 나선 동생 이재경이 피신한 것 때문으로 여겨짐.>
문_ 왜 납치되셨나요?
답_ 처음에는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숙부님을 찾았어요. 그 이재경이라는 분이 우리 숙
부님인데 원주에서 우익 청년단에 있으면서 좌익 공산세력을 근절시키려고 좌익 쪽과
대립하고 충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도 우파 독촉회에 이미 지원을 하셨고, 그러
면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월남인들을 잔뜩 도와주고 서울에 왔으니깐.
인민군 쪽 취조관이 나오면서, 그러니깐 강원도 쪽 토착 좌익들이죠. 뺨을 때리면서 재
춘이야 뭐 죄가 있나 하면서 숙부한테 앙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는 그런 이야기를
그분이 와서 전해준 거를 어머님이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납치 후 소식
<처음 끌려갔을 때, 집에서 운전해주던 분이 따라가서 낙원동 인민위원회로 들어가는 것
을 보았다고 함. 이 후 롯데 호텔 자리에 있는 국립도서관에 수감되어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큰누님이 매일 찾아갔고, 어느 날 포승줄에 묶여 차량으로 이동하는 아버지를
발견하였음. 아버지는 동생 재경이도 자수하라고 말하고 끌려갔다고 함.>
문_ 납치 후 아버님의 소식은 들으셨는지요?
답_ 그때 우리 집에서 운수업을 했기 때문에 운전사가 있었어요. 그분이 끝까지 따라갔
는데 종로 3가, 낙원동 인민위원회까지 들어가는 걸 봤다고 그랬어요. 낙원동 인민위원
회인가가 종로 3가인지는 모르겠는데 거기로 들어가는 걸 봤다고 그랬어요. 그 혜화동
큰집에는 어머님하고 큰누님만 있었죠. 그러면서 계속 수소문을 해 가지고 납북 인사들
이 그 당시의 국립도서관, 현재의 롯데 호텔 자리에 국립도서관이 있었는데 거기에 수감
되어있다는 소리를 듣고 거기를 매일 그렇게, 한 달 동안 어머님하고 누님이 번갈아 가
면서 둘이서 배회를 했다고 그래요. 그런데 어느 날 몇 대인지 모르겠지만 여러 대의 차
량들이 대기해서 수백 명의 납북인사들이 포승줄에 묶여서 나오는데, 거기에 저희 아버
지가 있는 걸 발견했어요. 그래서 어머님이랑 큰누님이 달려갔더니 걱정 말라고 하면서
동생 재경이도 자수하라고 그렇게 말씀하시고 끌려가셨는데… 그때 우리 숙부님은 그렇
게 순진한 분이 아니죠. 원주에서 가족들 남겨 놓고 혼자 자전거 타고 남쪽으로 혼자 도
망가셨죠. 서대문형무소로 이감한다는 그런 소식을 들었을 뿐 소식 없죠.
그리고 수년 후에 반공포로 석방된 이승만 대통령 때 그때 이재춘이 온다 그런 소문을
들었어요, 우리가. 그리고 우리가 원주에서는 제일 큰집이고 그래서 희망촌 세워주고
숙부님이 우선 원주에서 제일 큰 점원을 9명을 둔 만물상이라는 큰 잡화가게를 했으니
깐, 이재춘 이재경 형제를 많이들 알고 있었죠. 그래서 우리가 거리에 나가면 너희 아버
지가 돌아온다고 한 것도 기억하고 있어요. 근데 나중에 어머니가 알아보니깐 젊은 한국
인 이재춘인데 나이가 젊더래요. 동명이인이었던 거죠.
문_ 피난은 가셨나요?
답_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전쟁이 터져가지고, 25일 날 비가 많이 왔던 것으로 기억
해요. 26일인가 25일에. 비가 오는데 우리 식구들 이끌고 아버님이 남대문 종이공장으
로 대피시켰어요. 아버지가 작은 종이공장을 가지고 계셨거든요. 여기 자료에는 지물포
라고 되어 있는데, 조그마한 종이공장을 가지고 계셔서 거기 지하실에다가 우리가족하
고 우리 외가 쪽 일부를 거기로 대피시켰어요. 대피시켜 가지고 26일 저녁인가, 27일에
거기서 잤는데 거기서 자기 직전에 한강대교를 폭발 시켰다니깐. 폭파가 돼서 더 못 가
고 종이공장에 있었어요. 다시 공장에서 나와 가지고 아침에 혜화동 집으로 걸어서 돌아
가는데, 남대문 쪽에 아마 한국은행 근처에서 인민군들이 앉아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더
라고요. 열댓 명이 앉아가지고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데. 어떤 군인들은 서있고 어떤 군
인들은 앉아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탱크 한 대가 쭉 질주해서 오더라
고요. 그걸 내가, 우리 식구들이 봤어요. 그러면서 거기 그 탱크에 서서 탱크에 운전사
가 있고 또 한 사람이 밖에서 의기양양하게 보고 있고 탱크가 질주해 오더라고요.
그런데 일부 서울 시민들이 나와서 인공기를 만들어가지고 흔드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요. 저희 큰형 이름이 일선이에요. 막내가 오선이고. 그 사이에다가 충, 효, 정을 집어
넣었는데 어머님이 큰형보고 얘 일선아 고개 들고 가라 위험하다 그러니깐 큰형은 벌써
적군이 들어온 걸 알고, 아버님이 납치는 안됐지만 적군이 들어온 걸 알고 큰형이 보따
리를 메고 고개를 숙이고 빨리 앞으로 가는 걸 어머니가 주의를 줬던 걸 제가 기억을 하
고 있어요. 그래서 이제 혜화동 쪽으로 돌아와서 혜화동 로터리에 우체국이 있는데, 우
체국을 보니깐 사방에 총탄 흔적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내가 서울대 사회학과를 나왔는
데, 혜화동에서 서울대 쪽을 보면 개천이 복개가 안 된 상태여서 커다란 수도관이 있어
요. 그쪽으로 삼성대 쪽에서 인민군들이 동성고등학교를 끼고 막 쳐내려오면서, 국군들
은 당황하니깐 우체국으로 들어가거나 또는 복개 안 된 개천으로 들어가면서 그 수도관
커다란 수도관 쪽으로 그쪽으로 국군이 많이 들어갔다고 해요. 후퇴하면서.
집에 온 후 우리 집 운전수가 차가 있으니깐 우선 아버님만이래도 일부 가족하고 대피하
셨으면 좋겠다고 말을 했대요, 아버님한테. 그러니깐 그 운전기사 분은 나중에 수복이
되가지고 공보부 차관의 차를 운전을 하신 분인데, 그 형님이 그걸 권하셨다는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 없는 사람들 도와준 것 밖에 없다 그러면서 남대문 종이공장에서 집
으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 7월 4일 납북되실 때까지 그냥 외출만 하셨다가 들어오시고…
그런데 하루는 언짢아하시면서 들어오셨는데 인민 재판하는 걸 보고 들어오셨다 해요.
아버님 납치되신 후 저희 가족들은 전부 광주로 피난가고 큰누님과 어머님만 혜화동 집
에 계시면서 아버님 찾으시고. 그런데 어느 날 밤 12시가 넘어서 문을 다 닫았는데 인
민군들이 들어왔대요. 수명의 장교 복장을 큰누님이 기억하고 있으니깐. 어머님은 40
세고 큰누님은 17, 18세이니깐 큰누님을 건드리지 않을까 막 걱정을 했는데, 후래쉬를
들고 피난을 왜 안 나갔냐 하더니 어머님이 아버지가 피랍 됐기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에 집을 지키고 있다고 했답니다. 인민군들한테. 그랬더니 인민군들이
집을 샅샅이 뒤지더래요. 샅샅이 뒤지고 그대로 가더래요. 장교하고 사병들이 몇 명이
들어와서 집을 수색하고 간 일이 있었어요. 아, 참! 그 인민군들이 고맙고, 지금 생각해
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라요.

남은 가족의 생활
<원주에 많은 땅을 가지고 계셨고, 도지로 농작물을 받았기 때문에 생계는 어렵지 않았
고, 숙부가 돌봐줌.>
문_ 남은 가족은 어떻게 생활하셨나요?
답_ 아버님이 아무래도 월남인들의 집으로 희망촌을 만들어 주시고, 원주에 많은 땅을
가지고 계셨어요. 그거를 예전에 도지라고 해가지고, 작은형하고 어머님이 매번 수확기
에는 가서 그거를 받아 오시는 것을 본 일이 있어요. 쭉 그거를 몇 년 동안… 우리형제들
을 큰누님과 작은누님만 공부를 여고에서 했고, 형제들 중에 대학 가기를 원하는 형제들
은 다 대학 공부까지 시켰어요, 어머님이. 그리고 어머님이 아무래도 음식 만드시는 거
라던가 바느질, 여자분들 하는 그거에 밝으신 분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하셨어요. 미
도파 백화점에 가서 장사도 해보시고 하셨는데 다 실패하셨어요. 그 당시에는 사람들에
게 뜯기는 일이 많았는데 그때 그 많은 유산을 다 날리시고 애들 공부시키시고 가사를
다 탕진을 하셨을 뿐 뭐 관리를 못하셨어요. 그래도 숙부님이 생존하셔서 지금은 돌아가
셨지, 그쪽은 자식이 없으시니까 딸 하나 나중에 있고, 우리 8남매를 다 돌봐주셨어요.
내가 무일푼으로 미국 유학을 1969년에 떠났는데 비행기표 편도를 숙부님이 마련해주
셔서 미국 유학을 하고 올 수 있었습니다.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아버님을 찾으려는 노력은 하셨는지요?
답_ 그 당시에 서대문형무소로 이감한다는 그런 소식을 들었을 뿐, 그것은 추정일 뿐 인
것 같아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9·28 수복이 되면서 어머님, 누님이 제일 먼저 갔던 곳
이 서대문형무소인데, 뒤뜰에 10여구의 총상 당한 시체만 있었을 뿐 텅텅 비었다고 해
요. 그리고 나중에 어머니가 적십자사에 신고를 하셨더라고요.
문_ 정부가 도와준 것은 있나요?
답_ 없었어요.

호적 정리
<하지 않았음.>
문_ 호적 정리는 하셨나요?
답_ 본적지까지 가야 해서 서류를 직접 확인하지 않아 모르겠는데, 아마 그대로 살아있
는 것으로 있을 거에요.

연좌제 피해
<없없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있었나요?
답_ 신문사에 기자로 들어갈 때도 그런 얘기를 못 들었고, 미국에 69년 8월에 미국유학
을 떠날 때도 그런 소리를 못 들었고, 납북된 것이 확실했기 때문에 신고가 계속 적십자
사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기록은 안 남아 있을 것으로 봐요. 그래서 작년에 처
음 거길 참가를 했어요. 파주에 기념관 그때 총재가 지금 적십자 총재가 그분도 사회학
과 출신이에요. 어쨌든 연좌제 피해는 전혀 없었어요.

정부에 바라는 말
<한 인간으로써 체제를 선택할 권리가 있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정부정책을 비판할 권
리가 있음.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발전시켜온 세대로써 또한 지키기 위한 희생도 각오하
고 있음. 탈북자 활동 보장하고, 납북자 문제 북한의 대표를 만나 제기하기를 바람.>
문_ 정부나 대한민국에 바라는 점을 말씀해주세요.
답_ 나는 비교적 좀 사회 현상들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분석하고 고찰하고 설명하려
는 자세를 언제나 가지고 있어요. 그쪽을 전공했다고 하기 보다는 하나의 인간으로써 근
데 지금 정부에 대해서는 너무 섭섭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념을 떠나서 남북한의
동포인데 동포들이 체제를 택할 권리가 있어요. 내가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서도 통독
과정을 제가 봤는데, 그 인간으로써 체제를 택할 권리가 있어 가지고 동독주민들이 서독
으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거쳐서 동독이나 서독에서 다 보호해 주고 그러는 것을 봤
거든요. 그런데 이미 들어온 탈북자들에게도 지원은커녕, 그 사람들의 활동을 제한을
하고 그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서 어떤 선전 활동을 하거나 하는 것을 절대로 지양해서
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나는 이것을 절대적으로 반대하고 무슨 어떤 특정한 집회나 또
는 집단에 속해있으면서 적극적으로 활동은 안 합니다만, 한 사람의 대한민국 국민으로
써 비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서부터 진보 쪽에 있는 사람들
을 비판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절대로 그런식으로 하면 안 되고, 탈북자들에 대해서도
최대한으로 지원은 못할 망정 이 사람들의 활동을 방해한다거나 어떠한 죄를 씌워서 징
벌을 가한다거나 이런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 지금 다들 80이 넘
었지만, 한국에 이러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어떠한 일도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세대잖아요. 현 정부 어떻게 보면 후배들이고 같은 동
포들끼리 제대로 된 이념에 대한 자세를 가지고 합리적, 객관적으로 국제화 시대에 제대
로 하나의 정책을 수립해 주기를 바랍니다. 지금 최소한도 하다못해 몇 십 명만이라도,
만일 북한에 남아 있는 납북자가 있다면 또는 그 납북자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가족들이
있다면, 대한민국의 대표는 북한의 대표를 만나서 최소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입도 뻥끗 못하는 정부는 지지하기 힘들어요. 국가 대 국가로써 문제 제기를 해
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십 명이 남아있다고 해도 납북자들의 생사에 대해 확인하길 바
랍니다.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편안히 눈을 감으시고 편안하게 계시기를 바람.>
문_ 아버님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해 주세요.
답_ 108세 정도 되셨을 텐데,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또는 자연사로 돌아가셨는
지는 모르지만, 구천을 떠도는 것으로 제가 추측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디에 계시
던 평안히 저희 가족들 자녀들은 다 평안하게 잘 있으니까 이제는 눈을 감으시고 편안하
게 계시기를 빌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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