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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채록

납북자-이창두(증언자-이연자)
이름: 관리자
2021-09-23 12:28:54  |  조회: 123

190523A 이 창 두 ( 李昌斗)
생년월일: 1919년 8월생
출생지: 경북 영덕군 영해면 대진1동
당시 주소: 서울 서대문구 서소문동
피랍일: 1950년 8월 경
피랍장소: 자택
직업: 사업, 대한청년단 단장, 축구협회 회장
직계/부양가족: 부모, 배우자, 자녀 4녀
외모/성격: 똑똑하고 잘생긴 외모 / 남에게 베풀기 좋아함

증언자
성명: 이연자(1943년생)
관계: 장녀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서울에서 사업을 크게 하던 납북자는 서소문에서도 소문난 이로 대한청년단 단장, 축구협회 회장 등을
맡아 하던 젊은 사업가였음.
• 6·25전쟁이 터지고 딸린 식구들이 많아 피난을 가지 못하고 있던 차, 새벽에 무장한 이들에게 속옷차림
으로 급작스럽게 끌려감.

직업 및 활동
<대한청년단 단장, 축구협회 회장, 외국인도 찾아오는 큰 표구점을 함.>
문_ 납북되신 분은 무슨 일을 하셨나요?
답_ 당시 살던 곳이 서대문구 서소문동. 처음에 부산에 가서 지내다가,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서 사업한다고 표구점을 크게 해서 외국사람이 올 정도니까 큰 사업을 했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우리 아버지하고 연애하다가 눈 맞아서 서울로 그렇게 같이 따라간 거고
결혼하고, 사업한다고. 그래 가지고 옛날에는 돈을 자루에다 넣어가지고 구석에다 놔두
고 그랬어요. 그럴 정도로 많은 식구들을 아버지가 거느리고 있고. 그 시절에도 아버지
가 집에다가 논밭을 많이 사가지고, 삼촌들이 잘 살게 땅을 많이 사놓고 그래 가지고 피
난가서도 보릿고개에, 보리밥도 안 먹고 쌀가마니로 쟁여놓고 먹고 살았어요. 아버지가
납치 당해가고도. 시골에 땅 많이 사다 놔 가지고. 아버지가 똑똑해가지고 진짜, 서소문
에서 진짜 소문난 그거 였었어요. 미술 계통의 표구점도 크게 해가지고, 외국 사람, 일
본 사람, 미국 사람이 왔다 갔다 하고, 외국말을 통역하는 사람이 우리 고모부였어요.
고모부가 부산사람인데, 아버지가 고모를 불러 올려가지고 외국말 잘하는 사람과 결혼
시켜 가지고 똑똑한 사람을 고모 신랑으로, 그래서 그때는 뭐 떵떵거리고 살았어요.
문_ 아버님 성격이나 외모는 어떠했나요?
답_ 외모도 잘생기고, 성격도 식구들 다 자기가 감싸고 돌고 그런 걸 닮아서 우리가 딸
이 넷인데, 우리 다 남한테 주기 좋아하고 베풀기 좋아하고 그러고 살았어요. 그랬는데,
밤에 납치당하는 바람에 모든 게 그렇게…

납북 경위
<인민군 복장을 한 군인 서너명이 새벽에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고 난리를 쳐서 문을 열어
주었더니, 빨간 완장을 찬 인민군들이 총으로 위협하며 아버지를 속옷 차림으로 데리고
나감.>
문_ 어떻게 납북되셨나요?
답_ 아버지랑 같이 자는데, 막 와 가지고, 총을 가지고 땅땅거리고, 문을 두드리고 난리
를 치니까 (새벽 4시에) 식구가 다 깼지요. 이런데 빨간 완장을 찼더라고요, 총도 멨고.
총으로 위협하니까 꼼짝을 못하는 거죠. 우리 여동생들은 뭐, 나하고 세 살 차이니까,
다섯 살, 여섯 살 동생, 막냇동생은 막 낳아서 일년이나 지났나 그럴 무렵이었어요. 그
냥 속옷 바람에 막 질질 끌려간 거예요. 아버지가 대한청년단에 단장이었고 축구협회 그
런 데 회장이어서 끗발이 좋았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빨갱이들이 집에 막 들이닥쳐 가지
고 데려갔어요. 그때 막 비행기가 폭격하고 우리 옆에 한일병원이라는 큰 병원이 있었는
데, 거기를 막 폭격을 하는데 우리는 방공호에서 가족이 다 숨어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나는 이화유치원을 졸업하고, 덕수국민학교 1학년에 들어가고, 동생들은 아직 어리니
까 학교도 못 들어가고 그럴 때 6·25를 당했어요. 날짜는 기억이 안 나죠. 6·25 막 총
쏘고 저거할 때, 막 그거 끝나고 집에서 자고 있는 데, 빨갱이들이 막 쳐들어와서 잡아
갔으니까. 그리고 소문에는 미아리 고개를 가다가 한국사람들은 다 총살을 시켰느니 어
쨌느니 하는 소문이 있더라고요.
우리 집이 여기면 고모, 삼촌이 여기 살고, 우리 아버지가 다 얻어가지고 해줬는데, 삼
촌 한 분이, 아버지 바로 밑에 동생이 안 끌려간 이유 중에 하나는, 그때 삼촌이 막 머리
빠지고 하는 염병이라는 병이 있었는데, 그 병에 걸려서 머리가 다 빠지고 송장같이 누
워 가지고 죽게 생겼으니까 도로 아버지만 데리고 나가더라고요. 그 삼촌한테 우리가 큰
거예요. 안 끌려갈라고 그 병이 들어왔는지 몰라도, 그 병이 삼촌을 살려 준거예요. 삼
촌까지 끌려갔으면, 우린 진짜 의지할 데가 더 없었죠.

납치 이유
<당시 수완이 좋은 사업가로 반공단체인 대한청년단 단장, 축구협회 회장 등의 활동을
함. 통장, 반장까지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끌고 갔음.>
문_ 왜 납치되셨을까요?
답_ 우리 아버지가 대한청년단 단장에, 축구협회 회장에 여러가지 하는 게 많으니까 그
런 거를, 반장, 통장도 다 끌고 갔잖아요. 그니까 정부에 조금 뭘 하는 게 있는 사람은
무조건 다 끌고 간 거예요.

납치 후 소식
<다음날에 아버지를 보진 못했지만 집집마다 남자들을 끌고 가서 전봇대에 묶어서 총살 시
키는 것을 목격, 작은엄마가 평양 입구까지 가서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못 찾고 돌아옴.>
문_ 납북 이후 아버님의 소식을 들었나요?
답_ 한 서너 명이 왔고, 그 이튿날 보니까 그 군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잡아가지고 전봇
232 2부 증언자료 233
대에 묶어서 총살시키는 것까지 봤어. 우리 아버지는 마침 끌고 갔는지 어쨌는지, 나가
고 난 담에는 못 봤거든요. 아버지가 나간 담에 나와서 기웃기웃 보니까, 남자들을 막
집집마다 끌고 가서 전봇대에 묶어가지고 바로바로 총살시키고 그런 잔인한 인간들이
에요. 알아봤는데, 북한으로 끌려갔다고, 우리 작은엄마가 저기까지 갔었어요. 그때 아
버지 찾는다고. 우리 엄마는 애들이 많으니까 꼼짝도 못하고, 작은엄마는 애가 없으니
까… 시숙이 자기한테 너무 잘해줘 가지고, 시숙 찾는다고 막 어디까지 갔었다고 하더라
고. 근데 못 찾고 왔다고. 하여튼 평양 입구까지 찾아갔다는 것 같아. 그건 작은엄마한
테 들은 거죠.

남은 가족의 생활
<전쟁 직후에는 나물 뜯어서 먹고, 길거리에서 주워 먹고, 미군에게서 얻어먹으면서 생
계를 유지. 어머니의 재혼으로 작은아버지 집에서 살게 됨. 아버지가 논밭을 많이 사놓아
서, 피난가서도 먹고 사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작은댁에서 학교를 가르키지 않고 일
만 하게 됨.>
문_ 끌려간 이후 가족의 생활은 어떻게 하셨나요?
답_ 엄마는 애기들이 너무 작으니까 움직일 수가 없고. 또 뭐 배급 준다고, 줄서서 배급
타먹고. 한 번은 또 배급 자루가 나왔는데, 지금 생각하면 엿기름 같은 거 그거를 또 엄
마가 엿기름이 녹는다는 생각은 못하고, 밤에 갈아서 우리 먹인다고 빵을 만들어서 쪘는
데, 솥을 여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다 녹아버려서. 진짜 6·25 끝나니까 아버지는
납치당해서 가고 엄마하고 먹을 것도 없고 다 폭격맞고 그러니까 먹을 게 없잖아요. 그
래서 길거리에서 나물 뜯고 풀 뜯어가지고 먹고, 또 폭격한 데 가서 거지같이 TV에 나
오듯이 영화에 나오듯이 길거리에서 주워다 먹고. 또 미국사람들이 감사한 게, 미국차
가 막 다니면서 초콜렛이고 우유 그런 거 막 던져주고. 비참하게 지내다가, 시골에 할머
니, 할아버지는 안 계시고, 고모, 삼촌, 그리 내려가서, 시골에서 대전국민학교 들어가
서 다니고, 어머니는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인가 재혼을 해 가지고 영원히 못 보고. 어
디 경상도 의성인가 거기서 재혼해서 살고. 다른 시골 삼촌들은 이 삼촌같이 똑똑하지
못하고, 이 삼촌은 사업을 번창하게 해 가지고 배 사업, 연탄 사업, 그 동네에서도 아주
동원참치라고, 그게 그 동네에 공장이 있었어요. 거기 이사도 하고 그랬어요 우리 작은
아버지가. 동양연탄이라고 하면 울진군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우리는 엄마 아버
지 없이 졸지에 고아같이 할머니, 고모들은 참 잘해주고 그랬지만 그러니까 이제 아버
지 형제 중에 둘째 삼촌 집에 가서, 경북 울진군 후포면이라고 영덕 대게 많이 나고 하는
데, 그 동네에서 작은아버지가 사업을 하는 데 내가 어리니까 작은아버지를 아버지, 작
은어머니를 엄마 이러고 살았어요. 우리 딸 셋이서 거기 가서 살았어요. 하나는 지 엄마
따라가고 셋이서 거기서 살고 그랬는데 살아온 세월은 말 할 수가 없지.
삼촌 집에 사니까 학교도 뭐 국민학교 졸업하고는 삼촌 집에서 사업을 하니까 맨날 배
사업하니까 연탄공장 직원에 식모살이 하다시피 거기서 살았어요. 그리고 나는 조금 커
서 아가씨가 되니까 이제 연탄공장에서 사무도 보고, 배운 건 없어도 생각보다 똑똑했어
요. 그래 가지고 연탄 몇 차 나갔다, 얼마 들어왔다 나갔다 그런 경리를 맡아서 했어요.
그러다 우리 신랑을 만나서 신랑이 군인 시절 때 우리 동네 사람이 군에 갔는데 소개를
해서, 옛날에는 펜팔을 해 가지고, 성남에 아주 개발도 안되고 험할 때, 우리 집에서 반
대하니까 도망을 간 거예요. 우리 신랑이 인물이 반듯했어요. 인물 좋고 키 크고, 그때
만 해도 대학 다니다가 군에 가 가지고, 나하고는 배운 걸로는 맞지가 않지. 그래도 우
리 신랑이 그런 거를 다 이해하고 나는 연자랑 결혼하겠다고 자기 집에서 그래 가지고
나를 데리고 갔어요. 결혼도 안 하고 성남까지 가서 그렇게 살면서 시아버지가 약국도
하고 내가 먹을 복이 있으니까 어릴 때도 삼촌하고 살면서도 잘 먹고 잘 살고, 또 시집
와서도 시아버지가 뭐 약국하고, 목욕탕하고 2층에는 여관하고 밑에는 목욕탕하는 그거
를 신랑하고 나한테 맡겨가지고, 그거를 했었어요. 내가 그때만 해도 딸 둘 아들 하나인
데 아들까지 낳았을 때 나보고 너는 모텔을 보고 애비는 밑에서 목욕탕을 봐라 하고 맡
겨서 경제적으로 사는 것은 어렵지 않게 살았었어요. 그랬는데 우리 신랑은 말썽꾸러기
예요. 직장 조금 다니다가 바람나서 어디가고 없고, 속을 썩여도 내가 맏며느리기 때문
에 가정을 지키고, 내가 어릴 때 부모 없이 자랐기 때문에 우리 애들한테는 부모 없는 애
들처럼 안 보일라고 참고참고 산 거지. 심적인 고통을 많이 겪었어요. 시어머니도 나 젊
었을 때 시집살이를 엄청 시키고, 종갓집에는 매일 손님이 와서 며칠씩 자고가고 그거를
다 말없이 해냈었어요. 사십대, 오십대 때는 부녀회장을 해서 봉사활동으로 동네에 꽃
심으러 다니고 장갑 팔아서 독거애들 쌀도 사주고 라면도 사주고. 지금 이제 나이 들어
서 제일 지금 초라하게 남의 집에서 사는 거예요.
우리 남편이 먼저 찾아가서, 엄마가 의성에서 사는 데, 가니까 맨날 딸들 생각 때문에
울고 산다고 연자 좀 한번 오라 그래라 오라 그래라 해도 나는 엄마가 날 버리고 갔기 때
문에 엄마는 필요 없다고, 전에도 의성 산다고 그래도 한번도 안 찾아갔어요. 신랑이 한
번 갔다 오더니 엄마가 그렇게 너네들 못 봐서 맨날 울고 사니까 당신이 한번 얼굴이라
도 보이고, 죽기 전에 가보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아들이 지금 45세인데, 세
살 때 업고 의성을 갔어요. 그때만 해도 우리가 형편이 괜찮으니까, 그때 당시에 전기밥
통, 그런 게 시골에 없더라고요. 시장에 가서 전기밥통도 하나 사주고 다행히 영감을 좀
있는 사람을 만나가지고, 먹는 건 고생 안 하고 잘 사는데, 우리 엄마도 버리고 간 마누
라의 아들 둘을 키우고, 거기 가서도 또 딸 둘 놓고 아들 하나 놓고, 오남매를 키우고서
살았더라고요. 거기 영감이 또 너무 호인이더라고요. 내가 가니까 자기랑 별 아무 상관
없는데도, 그렇게 고맙게 딸 왔다고, 잘해주고 그냥 시골에서 염소를 잡아서 삶아가지
고 보약을 해준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랬는데 영감이 죽고 나니까 아들들이 재산을 다 빼
앗아 가버려서 엄마가 자기 낳은 아들하고 대구로 이사를 와 가지고 거기서 살면서 아들
하고 왔다 갔다 하고 그러다 엄마가 치매가 와 가지고 돌아가신다고, 그 아들이 나보고
엄마 마지막으로 보러 오라고 그랬는데, 가니까 엄마가 누나들 기다리느라고 눈을 못 감
는다 이거야. 며칠째 눈을 떴다 감았다 그런다고 자꾸 전화가 와서 우리 딸 셋이가 거길
갔었어요. 내가 엄마, 이제 눈감아도 돼. 우리가 엄마를 계속 미워하겠냐고 그땐 상황이
그랬으니깐 재혼을 했지 하면서 엄마 손을 잡고 다독거리면서 쓰다듬어 주고 이러니까
그때 돌아가셨어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아버지가 납북되고 나서, 정부의 도움이 있었나요?
답_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무 혜택도 없고, 내 생각에는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어요.
그런 지원을 해줘야 되는데, 하다못해 매달 연금이라도 몇 푼씩 보태주면 우리가 늙어서
살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여기서도 협조해달라고 날아오고. 이래서 우리가 지금 뭐 능
력이 있어 뭐로 살아요? 우리 할머니, 시어머니 요양원에 있는 것도 우리 아들이 지금…
둘이 맞벌이해서 네 식구 살기도 힘든데 우리 아들이 효자예요.

호적 정리
<작은아버지가 신고하여 정리함.>
문_ 아버님의 호적 정리는 하셨나요?
답_ 호적 정리는 자연적으로, 6·25때 행방불명자로 나와 있었어요. 영덕군 영해면에서
작은아버지가 신고를 했으니까. 우리 재산 좀 있던 거 다 팔아가지고, 자기 사업하는 데
보태 썼지만, 그렇게 신고를 했죠 가서. 

연좌제 피해
<사십대쯤 외국에 가려고 하니 제지되어 나가지 못함. 그 후에는 별 문제 없었음.>
문_ 연좌제 같은 피해는 있었나요?
답_ 아, 네 그거는 없었는데, 내가 젊었을 때 외국에 가려고 하니까 한 사십대쯤인가 그
랬을 때, 그게 제지가 되더라고요, 납치당해간 게. 친구들하고 어울려서 여행을 가려고
했는데, 북한으로 납치되어 간 사람은 외국을 못 간다는 게 있었어요. 그래서 못 갔지.
그런 담에 얼마 안 있어서는 외국에 많이 다녔어요. 그때 친구들하고 하여튼 뭐, 일본을
가려고 했나? 어딜 가려고 그랬나 그런 거 같아요. 근데 그 이후에는 북한 금강산도 가
고, 거의 7개국을 갔다 왔어요.

정부에 바라는 말
<연금 같은 경제적 지원을 해줬으면 좋겠음.>
문_ 정부나 대한민국 사회에 바라는 점을 말씀해주세요.
답_ 나는 서운한 게, 6·25 납치되어 이렇게 비참하게 살았으면, 그 대가라도 매달 요새
연금들도 잘도 주더만, 이거는 왜 연금을 안주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유공자라고 연금
주고, 뭐라고 연금 주고 연금 잘 주면서 왜 이거는 6·25때,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고
생을 하고 살았는데 경제적인 지원을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우리 어머니하고 둘이 산
다고 연말에 동사무소에서, 나는 창피해서 말 못하고, 내가 아는 동생이 내가 신청해 줄
게 해서, 거기서도 쌀 십키로 타 먹고. 또 동생이 언니, 내가 효부상 받게 해 줄게 그랬
는데, 어우, 하지말라고, 부모 모시는 건 당연한 데 하지말라고. 앞으로도 좀 정부에서
협조를 해줬으면 좋겠어요. 납북기념관도 못 갔어요. 내가 일하고, 몸도 아프고 이러니
까 차타고 지금도 앉아 있어도 어질어질해요. 가서 뭐 우리를 도와준다던가 그러면 몰라
도 아무 대책이 없이 늙은 할머니 둘이 사는데, 먹고 살 대책이라도 좀, 많이는 말더라
도 먹고 살 대책을 조금씩 지원을 해주면 좋겠어요.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아버지가 저승에서라도 편안했으면 하는 마음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절에 모셨음. 할머
니, 고모, 삼촌들이 잘 돌봐주었음.>
문_ 아버지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답_ 할 말이 너무 많지. 아버지 엄마를 내가 불교에다가 돈을 몇 백만 원 내서 절에 모셨
어요. 우리 삼촌이 살아계실 때는 돌아가신 날짜를 모르니까 아버지 생일날에 제사를 지
내주고 그랬어요. 내가 요새는 절에다가 엄마, 아버지 위패를 모셔서 절에다 제사를 지
내죠. 아버지는 너무 우리한테 잘했죠. 우리 집에서는 완전히 진짜 우리 집안에서 최고
기둥이었는데 무너진… 우리 할머니는 아버지 때문에 술을 잡숫고 맨날 우는 거예요, 나
껴안고. 그러다가 육십 몇 살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위암인가? 그때도 배가 이만큼
부어가지고 돌아가셨어요. 할머니, 고모, 삼촌들이 우리를 진짜 불쌍하게 여기고 잘해
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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