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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이주신(증언자-이영찬, 이경찬)
이름: 관리자
2021-09-27 15:37:10  |  조회: 1991
190930A 이 주 신 ( 尹三植)

생년월일: 1910년 9월 15일
출생지: 서울 중구 수표동 36번지
당시 주소: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
피랍일: 1950년 7월 10일경
피랍장소: 종로 4가 뒷골목
직업: 서울 지방 검찰청 부장 검사
학력/경력: 경성제국대학 법학전문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5남 1녀, 남동생
외모/성격: 중키에 곱슬머리, 강직하고 가정적임

증언자
성명: 이영찬(1935년생), 이경찬(1939년생)
관계: 이영찬(장남), 이경찬(3남)
증언성격: 간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피랍인은 전쟁 발발 당일인 6월 25일 오전 9시쯤 전화를 받고 급히 나간 후, 27일 오후 정부에서 일하
는 동료들과 함께 집에 들러 아이들 네명을 데리고 한강 인도교로 나갔음.
• 한강 인도교에서 경비하던 국군에 의해 도강이 저지되자 차를 돌려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피랍인
은 돌아오는 도중에 피신하였음.(당시 한강 인도교는 중무장한 군인들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그 경비가
심엄하여 민간인의 접근이 금지되었음.)
• 피랍인은 숙부 댁에 숨어 계셨으나, 밖에 나가지 말라는 숙부와 숙모의 만류에도 흩어져있는 가족들의 안
위를 확인하고 다니시다 종로4가 뒷골목에서 납치됨.

직업 및 활동
<서울 지방검찰청 부장검사로 재직 중이었음. 그 외 사회활동은 없었음.>
문_ 그 당시 아버님의 직업은 무엇인가요?
답_ (이영찬) 납치당하셨을 때, 서울 지방 검찰청에 부장검사로 계셨어요. 그 당시는요,
검사라는 말도 썼는데, 검찰관이라고 그랬어. 검찰관이라고 해도 일반 통용은 검사, 검
사했죠.
(이경찬) 아버지 직업에 대해서 좀 보완을 하면은 일반적으로 검찰관이라고 불렸지만은
공식명칭은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예요. 발령날짜가 1949년 관보에 109호로 지방
검찰청 부장검사로 발령난 근거가 있거든요.
문_ 관보에 난 걸 보셨어요?
답_ (이경찬) 네, 여기 관보에. 그러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공식명칭은 부장검사예요.
문_ 아버님의 경력과 직업 외의 다른 사회활동을 하셨나요?
답_ (이영찬)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공무원으로 계셨으니까.
문_ 아버님에 대해 좀 더 말씀해주세요.
답_ (이영찬) 강직하셨어요. 내가 학교를 1학년, 2학년 때 기억으로는, 집에 들어오는
거기에 행랑채가 있었어요. 대문 바로 열자마자, 그 사이에 행랑채가 있었는데, 거기
ㅇ기아버지라고 경찰로 근무하던 분이 있었는데, 내 얘기는… 그 누구냐 그 양반(○기
아버지)하고 내가 심부름을 많이 했어. 뭐를 했냐면 집에 들어오면 사과 궤짝 들어와 있
고, 뭐 들어와 있고… 그걸 돌려 주는 일, 아버지가 돌려 주라고 호통 치셨거든. 공판 전
에 좀 잘 봐달라고 그런 사람들이 갖다 주곤 그랬는데, 그만큼 엄격하셨어요. 우리 집이
참 가난하게 살았지.
(이경찬) ◯기아버지는 우리 본가집이 수표동에서 낙원동에 이렇게 하면서 대가족 아니
에요, 그 당시에. 근데 그 잡일하던 총각이었어, 그 사람이. 어려서부터 우리 집에서 잡
일을 했는데 일하면서 결혼을 해갖고 아버지가 분가되어 나오니까, 장남이니까 쫓아온
거예요. 대문 옆방에 가족이 기거하면서 아버지 일을 계속 도왔는데 아버지가 경찰관으
로 취직을 시켜준 거예요. 사법경찰관이죠. 그래서 이제…
(이영찬) 그 6·25가 나던 해에, 3월 26일이 이승만 생일로 알고 있어. 근데 그날이 일
요일 같았어요. 아버님이 계셨으니까. 근데 우리 식구가 다 모여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
는데 좀 늦었죠. 일요일은 늦게 하잖아요. 근데 전화가 왔어요. 그때 전화 있는 집이 많
지 않았거든 근데 우리 동대문구 쪽에는 교환이 있어서 통화하게 돼있어요. 그래 전화가
왔는데 갑자기 전화 받는 자세가 기립자세로 심각하게 뭘 받으시더라고, 그러더니 나 잠
깐 어디 좀 나갔다 와야겠다고. 그게 아마 경무대 가신 거예요. 경무대에서 전화 온 거
같아. 그런데 저한테 얘기를 안 하시고 어머니한테 얘기를 하신 거 보니까. 그때 법률비
서자리가 비어있었어요. 그래서 아버님한테 오라고, 근데 승낙을 안 하신 거야. 그때 승
낙을 하셨으면 정부하고 같이 남하하셨을 지도 모르죠. 그리고 또 왜 안 하셨냐하면 생
활이 아주 궁핍했다고요. 어머니 혼나셨지 뭐. 박봉가지고… 그래서 사표를 내시고 변
호사를 하려고 계획을 하셨던 것 같아.

6·25 전쟁 발발 당시 상황
문_ 6·25 당시 몇 학년이셨고 분위기는 어떠했나요?
답_ (이영찬) 경동중학교 3학년. 학기 시작한지가 얼마 안 되고 한 달 두 달 정도? 6·25
가 난 거 실감한 거는 바로 우리 동대문구 위로 이북 소련비행기 야크기가 낮게 떠서 휙
지나가더라고요. 그래서 아 전쟁이 났구나 실감한 거죠. 우리나라에 처음 있는 일 아닙
니까? 학교 갔죠 학교 갔는데, 아버님도 아마도 검찰청에 나가셨고, 갔는데, 강당으로
모이라고 하더라고, 학생들을. 강당으로 모두 가는데, 좌익계통의 학생들도 많이 있었
어. 그때 우리는 중학교는 6학년까지 있었거든. 1학년에서 6학년. 학제가 고등학교가
생기기 전이니까. 고등학교가 된다는 얘기가 그때는 있었는데 우리는 중3에서 고등학교
1학년 들어가는데 시험 없이 그냥 들어간 거죠. 그 다음부터 형식적인 시험이 있었죠.
강당에 모여 있었는데 내가 미술반이었어요. 미술반 학생은 따로 나오라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미술반으로 모두 갔는데 우리 위에 상급생들이 많잖아요. 그래서 뭘 제시하는데
스탈린 사진을 그리라고 하더라고요. 스탈린은 지금도 옆모습인데 그 당시에는 그 사람
들이 선전물로 레닌하고 스탈린하고 겹쳐서 찍은 사진이 있죠? 레닌은 빼고 스탈린 옆
모습만 가져와서 그리라고 그러는데, 내 지금도 눈감고도 그릴 수 있어. 하도 많이 그려
서… 하루에 수 십장 그렸어요. 저녁까지 그렸던 것 같아. 집으로 돌아왔는데, 강당에서
많이들 모였는데 그 후에는 내가 안 나갔죠. 아버지가 학교가지 말라고 하셔서…
문_ 그러면 공부는 하셨나요?
답_ (이영찬) 공부는 안 했죠. 그 당시 우리가 미술반 했을 때는 뭐했는지 모르겠지만 몇
번 모였던 것 같아요. 거기서 선동조가 나와서 누구 의용군 나가자. 그래서 거기서 의용
군 많이 나가서… 그때 키 순서로 번호를 매겼거든? 3학년 때는 내가 기억이 안 나는데
1학년때 20번 정도였었어. 그러니까 30번 이내인데 그 시대에 뭐 40번, 50번 윗사람
들은 많이 죽었어요. 의용군 나가서 어린데도 학교는 월요일 나가고는 바로 안 나갔죠.
근데 며칠 나갔던 사람 얘기를 들어보면 뭐 김일성 장군 노래 가르치고 선동하고…
(이경찬) 근데 지금 말씀하시는 거는 북한군이 진주하기 전, 그러니까 6·25가 일요일
날 일어났는데 월요일 날 학교 나간 거는 여기 서울에 진주하기 전이죠. 그런데 이미 좌
익들이 벌써 판을 치고… 그러니까 사회 분위기가 벌써… 사회가 굉장히 이념문제로 혼
란스러웠던 게 학교는 학교대로 국회는 국회 프락치사건으로… 일반 도시 풍경은 겉으
로는 평온했지만 조금만 골목으로 들어오면 대낮에 붉은 삐라 뿌리면서 다니고… 그 정
도로 혼란스러웠다고. 그러니까 전쟁이 일어나도 아직 대한민국 통치하에 있는데, 학
교에서 스탈린 그림을 그려라 그러는 건 벌써 학교에도 좌익들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는
거, 그거를 지금 얘기하고 있는 거거든. 서울이 함락된 게 28일이거든요. 벌써 그 전에
여기에 좌익 조직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거지. 전쟁이 났기 때문에 여기는 치안 부재
상태고, 무정부 상태 비슷하게 변해가고 있었고…
(이영찬) 6·25 전에 사회가 서울 시내, 남산서 좌익이 모여요. 종로 이런데, 대한 청년
단은 흰띠. 그 노란띠가 저 남산서 모이는 거야. 지금까지 노란띠가 있다는 것이 기분이
나빠. 난 어릴 때 노란띠가 기억이나요. 남산 쪽에서 많이 모였다고.
(이경찬) 서울이 28일에 적치하가 됐지마는 이전에 내부적으로는 곪아있었고, 노골적으
로 그런 활동이 있었던 거예요.
문_ 그때도 38선이 딱 그어져 있었나요?
답_ (이영찬) 38선 있었어요. 38선이 경계선이야.
(이경찬) 38선 있었죠. 그렇게 선은 그어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미 곪아 터져있었다.
문_ 그럼 아버님은 출근하셨어요?
답_ (이영찬) 집에 있었어요. 아무래도 아버님이 좀 뭔가 일이 터질 것 같으니까 준비 좀
하라고 어머님한테 얘기를 하신 거 같아. 근데 뭐 뉴스들이 다 그때… 심지어 동두천에
들어왔는데, 이쪽 뉴스에서는 ‘다 물리쳤다’ 이렇게 거짓말로 얘기를 하니까, 국민들은
믿고 있었지.
문_ 그러면 피난은 못 가셨나요?
답_ (이영찬) 그 당시 우리뿐만 아니라 피난 간 사람이 없었죠. (인민군이) 가까이 오니
까 총소리가 났잖아. 근데 그때 상황을 보면 우리 국군이 무기가 없었어요. 심지어 무기
가 뭐였냐면 대나무창 그런 거 가지고… 그건 군인도 아니지. 그리고 지휘관이라는 게
칼빈총 그거 메고 저쪽에는 탱크가 내려오는 데…
문_ 방송에서는 물리쳤다. 물리치고 있다고 하여 피난을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움직이
지는 않으셨나요?
답_ (이영찬) 움직임은 없었어요.
문_ 그때 당시 집 밖 동네 분위기는 어땠어요?
답_ (이영찬) 우리 동네가 창신동인데 비교적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저 낙산 쪽으
로 판자집 많고, 학교를 다닐 때 낙산으로 해서 돈암동으로 밤낮 걸어 다녔어요. 그쪽은
모르겠는데 우리 동네는 비교적 부촌이었어. 큰 부자들이 사는 건 아니지만 지금으로 하
면 중산층이죠. 그리고 뒤에 조그만 야산이 있었는데 거기에 일본인들이 살았어요, 옛
날에. 그러니까 그 동네가 조금 깨끗한 데였어. 해방되고 일본 아이들이 물러갔고, 우리
들은 해방될 때 원주에 있었어요. 그래서 그쪽 살던 창신동 상황은 잘 모르지.
문_ 그러면 학교는 안 갔고, 밖에 잘 나가시지는 않았나 봐요?
답_ (이영찬) 어머니가 못 나가게 했던 것 같아.
문_ 피난은 어떻게 하셨나요?
답_ (이영찬) 27일이죠. 27일부터 가족이 흩어지기 시작한 거에요. 나하고 바로 밑에
동생, 이기찬, 둘이 교복 입고 그대로 검찰청 차가 우리 집에 와서 아버님하고 셋이 탔
어요. 그리고 어머니한테는 친정집하고 약속이 돼 가지고… 을지로 4가?
(이경찬) 우리가 부르기는 황금정이라고 그랬어요. 지금 우래옥 자리에요.
(이영찬) 아버지와 같이 타고 가다가 또 다른 아버님 친구 되시는 검사 한 분이 계셨어
요. 나중에 저 뭐… 그분은 사셨어요.
(이경찬) 그분도 탔고 하여튼 차 안에 법조계 사람들이 꽉 찼어요. 그런데 아버님만 그
차에 우리들을 태웠다고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가려고… 그래서 그때가 6월 28일인가?
27일이다.
(이영찬) 그 지프차에 운전수하고 합쳐서 7명이 탄 거야. 그러니까 꽉 찼죠.
(이경찬) 그러니까 우리 형제 네 명을 또 데리고 탔으니까.
문_ 누구누구 탔나요?
답_ (이경찬) 나까지 데리고 나가려고 했는데, 바로 밑에 동생이(이성룡) 막 떼를 쓰고
그래서 할 수 없이 데리고 나갔어요. 걔는 어렸단 말이에요. 그 차가 한강 인도교까지
갔는데 그때 벌써 국군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하고 있었어요. 5m에 한 사람씩 헌병들이
무장을 하고 통제를 하고 있었는데 전부 차에서 내려라. 그 책임자 되는 장교가… 그래
서 전부 내렸어요. 경무대 대통령 비서관도 소용없어. 명령에 따랐죠. 그런데 전부 신분
을 확인하더라고, 이 차하고 애들은 못 내려간다. 왜냐면 우리가 한강 인도교까지 차를
타고 가면서 도로변을 보니까 동두천, 의정부, 청량리 쪽에서 피난 내려온 피난민들이
연도에 쭈구리고 앉아서 차 지나가면 박수를 치고 그래요. 그 차를 전부 위장했거든요,
나뭇잎으로. 그러니까 무슨 군인 차 인줄 알고…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을 보니까 특수계
층만 피난 내려가는 걸 보이지 않기 위해서인지 지침이 있어서인지 아이들은 안 되고 차
도 안 된다. 전부 걸어가라 이랬단 말이에요.
(이영찬) 그런데 걸어가는 것도 아마 다 내려 보낸 거 같지 않아요. 동요할까봐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 그 안희경(아버지 친구: 경무대 법률비서관) 씨라는 분이 그러면 걸어
서라도 갈 꺼 아니에요? 거기서 다 내렸는데, 바로 가신 게 아니고 밤에 배를 타고 갔대
요.
(이경찬) 다른 분들은 걸어갔는지 그건 모르지만, 하여튼 국군장교가 강력하게 민간인
을…
(이영찬) 장교가 헌병… 대령 같아. 상당히 높은 장교야. 대통령 명이라고 절대…
(이경찬) 몇 시간 후에 한강다리가 폭파됐잖아요 그날 28일 새벽에, 그러니까 그 직전에
우리가 한강다리를 갔는데, 작전상의 문제인지… 무슨 문제인지 모르니까 내려가지 못
하게 해서…
(이영찬) 근데 지금 모두 불평들이 많지. 왜 못 나가게 다리를 끊었나. 근데 그 다리 끊
은 사람 사형 당했지? 무슨 징계를 받았어요. 왜냐면 원래가 다리를 끊게 된 것은 적군
의 인민군의 탱크가 거기를 지나갈 때 끊기로 된 거야. 근데 미리 끊은 거야. 그때는 서
울에 참 불도 별로 없지 깜깜한 데 라이트도 안 켜고 물에 다 빠지고 그랬던 거죠.
문_ 그러니까 다리가 끊어진 줄 모르고 달리다가…
답_ (이경찬) 모르고 피난 가다가 전부 다이빙…
(이영찬) 그걸 가지고 탓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당시에는 시민들이 동요할까봐 못 건
너가게 했을 것 같아. 그게 다 착오죠. 다 지나간 다음에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는 모르
지마는…
(이경찬) 그래 가지고 아버지는 집으로 안 들어오시고, 우리들만 운전수가 집으로 태워
다 줬어요.
(이영찬) 돌아와 가지고 거기서 또 가족들이 갈라진 거예요. 어머님은 외가 쪽으로 가시
고, 저는 숙부, 숙부니까 작은아버지, 아버지 남자 형제가 세 분이었죠. 한 분은 이주국
이라고. 둘째가 이주달이라고 의사. 그분이 을지로 4가 인현동, 거기가 지금은 없어졌
는데 국도극장이라고 있어. 아세요? 국도극장 골목이 거기도 인현동인데. 그 동네 적산
가옥이 많은 거 보니까 일본인들이 살던데, 옛날에. 거기 영휘국민학교라고 있는데. 지
금도 있는지 모르겠어. 거기서 가깝죠. 그렇게 모든 형제들이 헤어졌어요.
문_ 그럼 이영찬 씨만 이주달, 작은아버님 댁으로 가신 거예요?
답_ (이영찬) 첫 번째는 그랬던 것 같은데, 나중에 넷째가 왔었지? 잠깐.
(이경찬) 나는 또 다른 데로 갔기 때문에 모르고…
(이영찬) 하여튼 6월 27일 저녁 밤에 거기서 지냈는데, 이제 불안하니까… 전쟁나면 폭
탄이 터진다던가, 파편이 날아오고 이러니까 담요란 담요는 전부 다 꺼내서 치고. 앞뒤
로 치고. 거기가 적산가옥이예요. 거기서 병원을 하고 계셨어. 그분이 서울에 사시기 전
에 전라남도 순천에서 개업하고 계셨어요. 그런데 여순 반란사건 거기서 그걸 당하신 거
야. 그래서 잘못하면 공비들한테 그분이 지리산으로 끌려갈 뻔했죠. 그 전에 진압군이
와 가지고 그래서 지방이 무섭구나 하면서 서울로 오셔서 작은 병원을 하고 계셨어요.
‘이 내과의원’이라고 조그만 병원을 하고 계셨어요.
문_ 그럼 거기서는 얼마나 계셨어요?
답_ (이영찬) 거기서 중간에 6·25와 6월 28일, 9.28사이에 많은 변동이 있었죠. 그
때 피난들을 모두 갔어요. 왜 갔냐하면 이 서울이 불바다가 되기 쉽다 이거야. 그때 아
마 유엔군 측에서 삐라를 뿌린 거야. 원래가 옛날부터 6·25 전, 일제 때부터 그 B-29
가 원자탄 떨어트린 폭격기입니다. 이 폭격기가 상당히 높이 뜨는데 거기서 삐라를 많이
뿌렸어요. 그래서 일본이 끝까지 악랄하게 전쟁을 하면 서울까지 전쟁터가 될 수 있으니
까 피난을 가라. 그렇게 모두 소개를 시켰죠. 그래서 우리가 원주에 가 있었어. 그 소개
로 거기서 또 작은아버지가 여기가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서울 중심가니까, 지방으로 가
야겠다. 북쪽 일산으로 갔어 7월에. 거기 누구? 해경이네? 우리네 사돈 되지. 작은어머
니의 친척 아는 분이 일산 어디 있다고… 거기가 농촌이에요.
그 전에 우리가 인현동으로 갔잖아요? 우리 작은어머니가 일찍 일어나셨는데, ‘야! 너 2
층에 한 번 올라가봐라’ 해서 2층에 올라가서 보니까, 그 영희국민학교가 보이는데, 새
벽이야. 영희국민학교에 벌써 그 빨간 기가 있더라구. 근데 그게 인민군 기도 아니고 러
시아기도 아니고, 그냥 빨간 헝겊이 날리더라고요. 그래서 내려와서 이제 담요를 제끼
고 보니까 거기 전봇대가 보이더라고요. 거기 벌써 위대한 김일성 장군님 만세가 붙었
어. 그때 첫 번째 탱크가 들어오기도 전이야.
문_ 그럼 그때가 언제인가요?
답_ (이영찬) 28일이죠. 한강 다리는 끊어 진거고. 한강 다리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어
요. 폭파되는 소리. 그러니까 한강 다리가 아마 미아리 정도 넘어왔을 때 끊었을 거예
요. 그때 벌써 그날 오후에 문을 두드리더라고 누가. 그러니까 벌써 붉은 완장 찬 사람
들이야. 이거는 이북에서 온 사람들이 아니거든. 문을 열었더니 인민군들이 들어오는
데 환영 나오라는 거야. 그래서 나갔던 기억이 나요. 나갔는데 을지로 4가인데, 그때도
참 애국적인 군인이 있었어. 제일 첫 번째 들어오는 탱크에 폭탄을 던진 거야. 탱크 하
나가 완전히 망가져 있었죠. 그랬던 기억이 나. 근데 그때 거기 시체가 많았어.
내가 나갔을 때는 이미 환영인파들은… 좀 늦게 나갔거든요. 내가 그때 열여섯 살이니까
이게 어중간한 거야. 그때는 그냥 나갔는데,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는 안 나갔죠. 내
가 대표로 나갔다고 나가서 상황을 알려드렸거든요. 그랬더니 우리 작은어머니가 머리
가 좋은 분이야. 그분이 안 되겠던 모양이에요. 아마 작은아버지 하고 의논하셨겠죠. 이
동네 사람들 반장을 부른 거야. 불러가지고 ‘비상시에는 모두 어렵지 않냐? 그래도 우리
는 또 병원이고 쌀이 있다. 이것 좀 나눠서 먹자’ 그래 가지고 했더니, 이 집이 혁명가의
집안이구나 말이야… 왜 그러냐면 우리 아버님이 거기 계셨거든요. 첫 번째 시아주버님
이 계신 거 아냐. 그러니 겁이 난단 말이야. 작은어머니가… 그래서 그런 수를 쓰신 거
죠. 그때 거기 아버지가 지하실에 숨어 계셨어요. 그날은 계셨어요. 근데 계속 계셔야
했는데, 들락날락 하시다가 납치당하신 거야. 납치당하신 날은 그 후인데…
문_ 그 후 언제쯤이죠?
답_ (이영찬) 몇 번 왔다 갔다 하셨는데, 그 뭐야 우리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생신이…
난 그거를 알아보니까는 아버님이 나가시면서 장인 장모 얘기를 하시더라고. 생신인가
뭐 이런… 근데 그분 생신이 겨울이거든요. 옛날에는 태어난 다음에 출생신고를 늦게 하
는 수도 있지. 그래서 생신에 가신다는 말을 했는데, 작은어머니가 아, 뭐 이런 혼란기
에 꼭 가셔야 되냐? 고 못 가시게 하고 그랬다고. 그런 기억이 나요. 생신은 아닌 거 같
애. 그런데 두 분이 다 겨울 쪽이에요. 한 분은 12월이고, 11월이고…
문_ 아버님은 둘째 작은아버지 병원 지하에 계속 숨어 계셨지만, 왔다 갔다 하셨어요?
답_ (이영찬) 어머니 계신대로 가는 거죠. 몇 번 왔다 갔다 하셨는데, 마지막으로 그때도
우리 숙모님이 계속 말리셨어. 나가지 마시라고. 근데 뭐 모자 쓰시고 밀짚모자 쓰고 변
장하신다고 하더라도 그 용태가 어디 가겠어요?
문_ 형님이 거기 계시는 동안 동생(이경찬)은 어디에 계셨어요?
답_ (이경찬) 나는 한강에서 집에 돌아온 이후로, 그때 그 차 타고 우리 형제만 돌아왔
고, 아버지는 어디로 가셨는지 안 보이셨어요.
(이영찬) 나가셨다가 을지로 동생 집으로 오신 거죠.
(이경찬) 집으로 오니까 어른들이 굉장히 당황해가지고… 전세가 이렇게 별안간에 불리
하게 될지 몰랐는데, 당황해 가지고 아이들을 가급적이면 먼 친척들한테 보내려고 숭인
동에 먼 친척이 한 분 사셨는데, 제사 때마다 모이고 그런 분들인데 거기다가 부탁한 모
양이에요. 그런데 거기서 답변이 식량이 없어서 힘들다. 거기도 다들 대가족이니까…
그 다음에 부탁한 집이 바로 윗집, 안성에서 농장 하시던 분인데 그분한테 부탁해서 당
신네 고향에 보내 달라, 그래서 그 집에서 오케이 했어요. 그래서 나하고 큰형님하고 그
분이 종로 6가에서 약재상을 했었는데, 한약재. ‘그럼 가게 앞으로 나와라. 그러면 데리
고 가겠다’ 하니까 어머니가 부랴부랴 주먹밥을 싸 가지고 같이 들려서 보냈는데 날이 어
두워지도록 아무도 안 오는 거야. 가게문은 닫혀 있고… 형님(이영찬)과 같이 갔어요.
그래서 그 주먹밥을 갖고 집으로 다시 왔어요. 그러니까 집안 어른들이 당황해가지고 우
왕좌왕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동네 사람들이 와서 동네 어귀에 수상한 사람들이 자꾸
만 이쪽 망을 보고 있다 해서 더 당황한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다. 가까운 친척집이라
도 집을 버리고 그쪽으로 옮겨야 되겠다고 해서, 나는 아까 얘기한 외할머니 집, 황금동
지금 을지로 4가. 지금 우래옥 자리 그리로 배정이 됐어요. 밤에 그리로 갔어요.
나중에 알게 됐지만, 우리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의 바로 밑에 남동생, 종로구 종로 3가
봉익동에 집이 있었는데, 막내하고 바로 위에 여동생 데리고 그 집으로 갔고, 그리고 나
는 어떻게 혼자서 외할머니 댁에 갔어요.
(이영찬) 둘째 기찬이도 거기 있었지 않아?
(이경찬) 아니. 나 혼자 있었어.
문_ 그럼 둘째(이기찬)는 어디로 갔을까요?
답_ (이영찬) 나하고 을지로 4가로 갔던 것 같아요. 갔는데 거기에 걔는 오래 안 있었어
요. 아마 아버님하고 같이…
(이경찬) 그러니까 그때 먹는 게 문제니까, 별안간에 이런 난리를 당해서… 저는 이제 외
할머니 집에 혼자 갔더니, 외할머니가 저녁 때 이불을 아랫목에 깔아주면서 거기서 자라
고 그런 기억도 나고, 그 이튿날 잠에서 깨니까, 아침 해가 떠서 어느 정도 한 10시쯤 되
니까 대문을 그냥, 여자들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빨리 나오라고, 붉은 기 들고 말이지.
그래서 나는 열두 살짜리니까 무슨 일인가하고 이제 나갔어요. 나가면 바로 을지로 4가
예요. 거기서 북한군이 기갑부대, 선발대가 들어오는 걸 목격했어요. 근데 어떤 모습으
로 들어왔냐 하면 기관포로 공포를 쏘고 사기충천한 모습으로 사람들이 붉은 기 들고 이
렇게 흔들고 걔네들 탱크 한 대가 불에 타고 있는 장면을 봤거든요.
(이영찬) 을지로 4가, 외가가 저 있던 데하고 가까워요. 걸어서 10분밖에 안 걸려요.
문_ 아버님 생각은 가능한 흩어져서 한 명이라도 안전하게 하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답_ (이경찬) 그렇죠. 그런데 가까운 친척이라는 게 외갓집은 본가 삼촌 한 분 밖에 없잖
아요. 그러니까 거기로 분산을 시켰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우리 숙부네는 형님이 갔고
우리 외할아버지네는 내가 갔고, 우리 외삼촌네는 어머니가 가셨고, 뭐 세 군데 이렇게
분산된 게 아닌가.
(이영찬) 막내 삼촌도 나와 같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버님이 안 들어오시니까 아버지를
찾으러 나가셨다가 그분도 행방불명이 된 거야.
문_ 그럼 그분(이주국)도 납북되셨다고 결정 받으셨나요?
답_ (이경찬) 아니요. 내가 그 납북자 신고를 안 한 이유가 있어요. 그분이 초기에 의용
군으로 끌려간 걸로 나중에 됐는데, 행방불명이 됐는데 정부 어느 기록에서도 납북자 명
부에 없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 통 반을 통해서 납북된 사람이 있느냐, 이런 것도 있지
만, 가족이 신고를 해야 되는데 어른들이 신고를 안 한 거예요. 바로 위에 형님인 인현
동에 사는 우리 숙부도 신고를 안 한 거예요. 그런 면에서 이게 납북이냐, 의용군 지원
이냐… 지원인가 이런 것도 모를뿐더러 내가 지금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내가 또
신고를 안 한 게, 그래도 큰형 밑에서, 큰형 식구가 그런 곤경에 빠졌는데 그때 서른 살
이면 아주 어른 행세하던 때거든. 7월 7일 경에는, 강제모병 의용군 징병이 없었거든
요. 그 시기에 갔기 때문에 내가 신고를 안 한 거예요.
문_ 그러면 막내 삼촌(이주국)은 7월 7일 이전에 행방이 묘연해지신 건가요?
답_ (이경찬) 그건 7월 7일 이전인지, 7월 7일 이후인지 모르지만 초기에… 네.
(이영찬) 아니 그러니까, 을지로 4가 둘째 숙부 집에서는 아버님이 나가신 다음 그 다음
날에 나가신 거야. 찾으러 나가신 거야. 저녁까지 기다리시다가 들어오겠지, 들어오겠
지 하고 기다린 거죠. 안 들어오잖아? 그러니까 이제 뭐 문제가 있다 그러더니 막내 숙
부가 내가 찾아와야겠다고 찾아 나가신 거야. 그게 마지막이야.

납북 경위
<피랍인과 증언자 포함한 아들 네 명, 동료 검사들이 차를 타고 한강 인도교까지 갔는데,
국군들이 차와 애들은 안 된다고 하여 동료 검사들은 그곳에서 내리고 차를 돌려 아들들
은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피랍인은 작은아버지 댁으로 피신함. 그 후 친척집에 흩어진 가
족들의 안위가 염려되어 변장하고 확인하러 다니다가 7월 10일경, 종로 4가 뒷골목에서
잡혔다고 들었음.>
문_ 어떻게 납북되셨나요?
답_ (이경찬) 아버지가 탄 차가 한강 인도교까지 갔는데, 그때 벌써 국군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하고 있었어요. 5미터에 한 사람씩 헌병들이 무장을 하고 통제를 하고 있었는
데, 전부 차에서 내려라. 그 책임자 되는 장교가 그래서 전부 내렸어요. 경무대 대통령
비서관도 소용없어. 명령에 따랐죠. 그런데 전부 신분을 확인하더라고. 이 차하고 애들
은 못 내려간다. 왜냐면 우리가 한강 인도교까지 차를 타고 가면서 도로변을 보니까 동
두천, 의정부, 청량리 쪽에서 피난 내려온 피난민들이 연도에 쭈구리고 앉아서 차 지나
가면 박수를 치고 그래요. 그 차를 전부 위장했거든요, 나뭇잎으로. 그러니까 무슨 뭐
군인 차 인줄 알고…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을 보니까 특수계층만 피난 내려가는 걸 보이
지 않기 위해서인지, 지침이 있어서인지, 아이들은 안 되고 차도 안 된다. 전부 걸어가
라 이랬단 말이예요. 그래 가지고 아버지는 집으로 안 들어오시고, 우리들만 운전수가
집으로 태워다 줬어요.
(이영찬) 왜 그러냐면 우리 아버님이 작은아버지 댁에 계셨거든요. 첫 번째 시아주버님
이 계신 거 아냐. 그러니 겁이 난단 말이야. 작은어머니가… 그래서 그런 수를 쓰신 거죠. 그때 거기 아버지가 지하실에 숨어 계셨어요. 그날은 계셨어요. 근데 계속 계셔야 했는데, 들락날락 하시다가 납치당하신 거야. 납치당하신 날은 그 후인데 몇 번 왔다 갔다 하셨는데, 마지막으로 그때도 우리 숙모님이 계속 말리셨어. 나가지 마시라고. 근데 뭐 모자 쓰시고 밀짚모자 쓰고 변장하신다고 하더라도 그 용태가 어디 가겠어요?

납치 이유
<대한민국 국가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적 치하에서 북한 기관원에 의해 피랍 됨. 당시 북한 체제하에서 남한의 검찰을 비롯해 국군, 공무원, 경찰, 애국청년단원 등은 그들의 1차 제거 대상이었음.>

납치 후 소식
<3남 이경찬 증언자가 외할머니 집에 있을 때 아버지가 밀짚모자에 무명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잠깐 찾아오심. 휴전 후 대중잡지 《희망》 1955년 3월호에 게재된 전 연합신문 편집국장 배상하 씨의 탈출기 ‘납치인사 생환기-나는 이렇게 탈주했다’를 통해 아버지가 서대문형무소에 음악인 김해송과 함께 수감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음. 그 뒤로 2006년 3월 제13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통해 막내 삼촌 이주국의 가족을 만나봤지만, 아버지에 대한 소식은 들을 수 없었음.>
문_ 납치 후 소식을 들으셨나요?
답_ (이경찬) 그분(이주국)의 가족을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우리가 만났거든요. 금강산 행사에서, 2006년에 상봉했을 때 이주국 삼촌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근데 의용군으로 나간 게 확실하고, 그리고 그분이 서양화가거든. 그 체제에서는 화가가 굉장히 필요한 인재란 말이에요. 그 방면으로 종군을 하고, 또 전쟁이 휴전이 된 후에 평양에서 미술가 동맹에 소속되어서 그쪽 체제에서 일하다가, 이제 60년대에…
(이영찬) 근데 우리 숙부가 굉장히 그림을 잘 그리시고 여기서 남쪽에 숙부보다 몇 살 위의 그분은 우리 둘째 숙부하고 동창이야, 사범초등학교. 그런 화가 한 분이 계셨어. 근데 그분이 우리 경동중학교 미술 선생님으로 계셨거든요. 그래서 그분이 날 만나면 ‘자네 숙부가 지금 있었으면, 자네한테 도움이 될 텐데…’ 상당히 나이가 어린 화가로서 그림을 잘 그리셨어. 그때 국전이라는게 없어졌지만 조선미술전람회라는 게 있었는데, 그림을 그리고 싶으셨는데 그림을 그리는데 돈이 많이 들어요. 물감 값 그런 걸 조달하기 위해서인가, 그래 일제 때, 가네보라는 데가 있었어. 종방? 화장품 나오는 데 아시죠? 거기 선전부에 있었어요. 거기서 돈을 받아서 그림을 그리시고 뭐 그랬던 것 같아요. 우리 조부가 그림 그린다고 그러니까 지원을 안 해주신 거 같아. 그때 이 분이 우에노 미술학교, 일본 동경 그 학교 좋은 학교죠. 거길 가보고 싶어 하셨던 거지.
(이경찬) 그분의 작품 중의 하나가 화신백화점 선전부에 있으면서 디자인도 했었지요? 그런데 정부 수립되고 서울시 마크를 공모했는데, 그분의 것이 당첨이 되서 얼마 전까지도 그 로고가 그분의 작품…
(이영찬) (그림 그리며) 이거 생각나세요? 서울시 마크가 이거였잖아. 이게 우리 숙부가 당선되는 데 그때 돈이 그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신이 나서 사과 궤짝을 사오시고 그랬던 기억이 나.
(이경찬) 사대문을 상징한 거지. (사진을 보여주며) 숙부의 사진.
(이영찬) 그런데 옛날 아명이 있어. 아명이 상길이야. 아버님이 ‘상길아, 상길아’ 이렇게도 부르고 그러셨지.
문_ 이산가족 상봉 때의 말씀 좀 해주세요. 두 분이 같이 가신 건가요?
답_ (이경찬) 그 숙부는 1965년에 함경도 덕성군 중동에서 농사짓다가 85년에 사망한 거예요. 그래서 그 부인하고 그 넷째 아들이 나왔어. 그 사람들을 나는 특수 이산가족 신분으로 만났거든요.
(이영찬) 우리가 이렇게 앉아 있는데, 우리가 먼저 자리에 앉아 있었죠. 근데 저쪽에서 이북에서 오던 사람들이 들어오더라고, 그러니까 내 동생이 되지, 삼촌의 아들이니까, 한 스무 살 차이가 나지만. 딱 보는 데 그냥 우리 삼촌의 얼굴이야. 너무 비슷하게 생겼어요. 숙모 따라왔는데 숙모는 조금 이상해. 숙모 닮은 데가 없고, 애들이 키가 상당히 크고…
(이경찬) 숙모라는 사람이 정말 숙모인지, 그쪽에 무슨 어떤 가공으로 들여보낸 사람인지…
(이영찬) 그럴 정도의 연령으로 봐서 우리 삼촌은 나이가 어렸는데, 어쨌든 평양에서 걔네들한테 협력을 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덕성군 있는 데가 개마고원의 초입이야. 화전민들 사는 데가 아닌가. 형편없는 생활을 한 거지.
(이경찬) 60년 초에 그쪽으로 간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의심을 한 게 의자에 앉자마자 대뜸 ‘큰아버지는 지금 생존해 계십니까?’ 이렇게 물어보더라고.
(이영찬) 그게 이산가족 상봉에 가면 지금은 모르지만 우리 때는 다섯 번을 만났어요. 마지막에는 한 시간짜리, 헤어질 때. 그리고 다섯 번을 만났는데 만날 때마다 말이 달라. 그러니까 이게 뭐, 이해가 안 되는 게 많지 뭐.
문_ 이주국 삼촌의 아들이 확실하던가요?
답_ (이영찬) 틀림없는 아들은 아들이야.
(이경찬) 그런데 부인은… 그 어떻게(이주국 삼촌과) 결혼했냐고 물어보니까.
(이영찬) 대답을 안 해.
(이경찬) 그 사람은 6·25때 간호병으로 참전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군대에서 알게 되었
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평양에서 결혼했다 하더라고. 그런데 조금 더 의심이 가는 게 뭐
냐면, 제가 어느 정도 달러를 준비해 갖고 2천불을 준비해 갖고 갔어. 근데 그 달러를
고액권으로도 하고 소액권으로 나눠서 했는데, 그걸 꺼내니까 서로 집어넣으려고 하는
데 그게 모자간이면 그럴 수가 없는데… 그런 모습을 보이더라고요.
(이영찬) 또 하나 조금 의심가는 게 뭐냐면 숙모가 되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그러면 나
보다 나이가 위인데, 그분이 고향이 어디냐고 하니까 개성이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개
성 말투가 아니야. 그게 아무리 떨어져서 김일성이가 섞어놨다고 그래도 그 연령이 되면
옛말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도 아니야.
문_ 아버님 납북되고 난 뒤의 상황 좀 말씀해 주세요.
답_ (이영찬) 계속 어머니가 하루걸러 밖에 나가서 아버님을 찾으신 거야. 여러 사람을
통해 가지고.
(이경찬) 7월 초에 저는 외할아버지 댁에 외할머니하고 같이 있었는데, 그 집이 큰외삼
촌 댁이거든요. 거기가. 외삼촌이 밤중에 나를 데리고 을지로 입구에 있는 삼각동 어느
집으로 데리고 갔어요. 그때 갈 때 둘째 형하고 같이 갔어, 내가. 지금 거기가 경기빌딩
자리인데 거기 큰 한옥이 있었어요. 거기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안
채로 들어가는 거고 왼쪽으로 들어가면 별채인데, 그 별채 마당에 깊이 파져 있는 창고
가 있어요. 옛날 사람들은 마당에다 장독을 거기다 넣어놓고 그랬거든요. 밤중에 거기
도착했는데 (당시 삼각동), 거기 이렇게 (위로) 여는 문이야. 뚜껑을 여니까 그 안에 어
머니하고 막내 애기하고 여동생까지 쳐다보고 있더라고요. 거기 숨어있다 거기 또 모였
어 한 번은. 아버님이 그때까지는 안 잡혔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위해가 있었던 게, 그
후에 어느 판사네 가족은 몰살을 당했단 말이지.
문_ 그 판사는 누군지 아세요?
답_ (이경찬) 몰라요. 어머니한테 들은 얘기라. 그러니까 그렇게 살벌하던 시기였단 말
이에요. 거기에 며칠 있었는데 밤이면 거기 지하실에 들어가서 자고 우리는 어리니까 낮
에는 나와서 배회를 하고 돌아다니고 그랬는데…그때 아마 일산에 있었을 거예요. 그
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이제 잡혔으니까 괜찮다 다 나와라 이런 얘기를 듣고 다 나왔어
요. 그래서 간 게 (종로구) 봉익동으로 갔는데, 그 집이 어떤 집이냐 하면 둘째 외숙모의
친가에요. 둘째 외숙모의 남동생 뭐 이런 분들이 안채에 살고 있었어.
(이영찬) 우리 사돈집이지.
(이경찬) 그런데 그 외숙모의 형제들이 전부 뭐 고학력, 전부 대학에 다니고 깨어있는 계
층이에요. 그런데 조금 좌익 활동을 하신 분이기 때문에 적치하가 되니까 적극적으로 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거기는 안전하다 그래서 외숙모가 자리를 마련해준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한 며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 아버지가 잡혔으니까 이제 괜찮다 이런 걸 알려
주는 걸로 봐서, 이미 뭐 그쪽 정보원들이 추적하고 가족들의 소재 파악하고 그러고 있
었던 게 아닌가. 그래서 거기서 나와서 다시 우리 가족들이 재편을 한거죠.
(이영찬) 저는 그 6월 27일부터 끝까지 (9.28이후) 일산으로 갈 때까지 인현동에 있었
어요.
(이경찬) 그러니까 우리하고 전혀 다른 생활을 한 거죠.
(이영찬) 그때 넷째(이성룡)랑 같이 갔어요. 거기서도 우리 할머님이 계셨어요. 우리 아
버님 낳아주신 할머니인데, 우리 아버님이 큰집으로 양자로 가셨거든요. 그러니까 그
집에서는 우리 숙부, 의사 숙부가 모시고 계셨죠. 거기 할머님하고 아이가 둘. 장남하고
장녀. 그땐 나이가 어렸죠. 왜 어렸는지 아냐면 내가 트렁크를 메고 일산을 가는데, 내
크렁크 위에 동찬이를 올려놨거든. 얼마나 힘든지. 그러고 일산을 새벽에 떠났는데 깜
깜할 때 들어갔어요. 걸어가는 거니까.
(이경찬) 거기서도 이제 어머니가 애들 넷을 데리고 들어가니까 먹는 게 제일 문제기 때문
에, 나는 외숙모 외삼촌 집에서 외갓집에 선산이 일산에 있었어요. 일산에 굉장히 큰 선
산이 있었는데, 거기 묘지기 집으로… 묘지기 집에 갈 때 내 둘째 형하고 같이 갔어요.
둘째 형은 큰 산소 묘지기 집에 배정이 되고, 나는 거기서 또 쫓겨나서 산골에 있는 옛날
또 다른 묘지기 집이었는데, 내가 살던 환경하고 너무 달라서 하룻밤 자고 탈출했잖아.
열두 살 나이에, 일산에서부터 다시 어머님 있는데 걸어서 왔다고.
(이영찬) 거기가 어디지?
(이경찬) 독고지라고, 지금으로 치면 화정. 일산 화정에서 한참 들어간 산골이에요.
(이영찬) 그런데 우리 숙부집도 또 갈라졌어요. 숙모는 안 따라갔거든. 어린 애들이 있
었어요. 그래서 서울에 계셨죠.
문_ 아버지가 납북이 됐다는 건 어떻게 아시게 되셨어요?
답_ (이경찬) 그거는 이제, 우리가 숨어있을 때 내가 외할머니 댁에 있을 때 여기 서울이
인민군 치하가 된 지 얼마 안됐을 때 같아요. 낮에 무료하게 마당에 서 있는데, 대문이
열리더니 웬 농부가 들어오더라고, 밀집모자에 무명 바지저고리, 하얀 거 입으시고 들
어오는 데 내가 보는 데도 농부 같지는 않아. 그 무료한 생활에 아버지가 오니까 반가워
서 뛰어 갔더니, 그냥 외면을 하고 대청마루 쪽으로 걸어가시더니 망연자실하게 툇마루
에 앉아있는 거야. 그래서 난 무안해서 마당에 서서 평소에 보던 아버지가 아니니까 이
렇게 서 있었지. 그랬더니 그때 외할머니가 혼자 계셨어요, 저하고. 다른 외삼촌이나 다
른 이들은 어딜 갔는지 모르고 외할머니보고 세숫물을 떠다 달라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맏사위거든요? 우리 아버지가. 그냥 그 마당에 수돗가에 가서 놋대야에다가 찬물을 떠
서 발에다 놓으니까 한참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더니, 얼굴에다 이렇게 (세수)하면서 흐
느껴 우시더라고. 그래 가지고 나는 무안해가지고 그 자리에 서 있었어. 그러더니 조금
있다가 나가시는 거야. 대문 쪽으로. 나라도 쳐다볼 줄 알았는데 전혀 외면하고. 지금
생각하면 자기로 인해서 애들이, 내일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철없는 애들을 볼
수 없었던 거야.
(이영찬) 뭐 혼이 나가신 거야… 그 숙모님이 못 나가게 하는데도 안 들리시는지 이상하
게 나가시더라고. 절대…
문_ 가족들이 전부 다 흩어져 있기 때문에 안위가 염려 되셔서요?
답_ (이영찬) 왔다 갔다 하신 거야.
(이경찬) 을지로 4가 왔다가, 종로4가 어머니 있는데 왔다가… 그러시다가 적십자 신고
서… 종로 4가 뭐 뒷길. 뒷골목에서 잡혔다는 거 보니까 (당시 병원 하시던 숙부님이 신
고) 그게 거의 맞지 않을까…
(이영찬) 첫 번째 잘못은 정이 많으셔가지고 자식도 많고, 한강을 그냥 넘어가셔야 하는
데 밤에 있다가, 근데 집에 들어온 것 자체가 잘못이죠.
(이경찬) 이게 실향사민신고서인데 이게 필적이… 1956년도인가 그런데. 여기는 종로
4가 이도에서 납북이 됐다.
문_ 둘째 숙부님께서 아버님이 어디서 납치를 당했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
답_ (이영찬) 나중에 안 거죠. 그럼요.
문_ 혹시 어떻게 나중에 알게 되었는지 들으셨어요?
답_ (이경찬) 그건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이영찬) 숙부도 숙모랑 한 동네에서 상당히 신경을 쓰셨어요. 형제간 아니에요. 그래서
계속 숨어 계셨어요 거기서.
(이경찬) 이 명부에 기록되어 있기에 (아버님의 납북이) 7월 7일에서 7월 9일도 있고 그
러니까 7월 10일 전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남은 가족의 생활
<가족이 모두 뿔뿔이 흩어짐, 1.4후퇴에서 구포읍으로 피난을 갔을 때에는 정부가
1949년 농지 개혁으로 수용한 토지의 ‘지가증권’ 현금 상환이 이루어져 생활을 하다가 집
으로 돌아와서는 집을 세주고, 아버지 친구들의 도움으로 어머니가 청소부 일을 하며 생
계를 유지함.>
문_ 남은 가족들의 생활은 어떠셨나요?
답_ (이경찬) 1950년 9.28 수복이 되고, 서울이 수복이 됐잖아요. 조금 있다가 1.4후
퇴가 있었는데, 그때 경상남도 구포읍으로 피난을 했거든요. 생계는 막막하잖아요. 애
들은 여섯이고.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우리 집안의 종손이고 그래서 온양에 농토가 많았
어요. 그런데 6·25 전쟁 나기 전에 1949년인가? 농지 개혁을 했어요. 그래서 경작을
직접하지 않는 지주는 정부에서 채권을 주고 경작자에게 분배를 했는데, 그 채권의 상환
이 우리가 피난을 가서 그게 상환이 있었어요. 그 채권이 돈으로 분할해서 주니까 그걸
로 생활을 한 걸로 알고 있어요. 굉장히 많은 농지였기 때문에 그거 가지고 어느 정도 생
활이 된 거였어요. 농지 개혁에 지가 증권이라고 하거든요.
(이영찬) 그거 때문에 학교를 다닌 거죠. 그때 두 끼 밖에 못 먹었을 거예요. 기억이 나
는데, 부산으로 학교를 다녔잖아요. 구포에서 부산이면 기차가 통근차죠. 통근차는 9
시 전에 모두 직장에 들어가야 되는 건데, 이게 경부선이란 말이에요. 근데 그때가 전쟁
할 때라 통근차가 제시간 맞춰 다닐 수가 없어요. 군인 올라가죠, 다친 사람 내려오죠,
병원차, 또 탱크 뭐 막 올라가고 어떤 때는 1시 도착할 때도 있어요. 통근차가. 그때 학
교가고. 근데 그 우리 친구들이 같이 다닌 사람이 있는데, 나는 기억이 안 나. 하도 굶는
일이 많기 때문에 기억이 안 날 거야. ‘야, 너는 배고프단 말을 안 하냐?’ 그래, ‘점심시간
에 어디 갔느냐?’고. 천막 교실이죠, 학교가. 부산에 있는 학교들도 다 뺏겼죠. 외국인
있죠, 군인들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천막에서 공부를 하는데, 점심시간 되면 점심
을 먹죠. 나는 남이 점심을 먹고 있는 걸 구경할 수 없잖아. 그러니까 점심 먹을 때쯤 되
면 산으로 올라간다고. 다 먹은 다음에 내려오고. 그런 정도니까… 피난을 갔는데, 그때
열일곱 살이지. 한 해가 지나서. 지금 부산 비행장인가? 그전에는 부산시가 아니라 김
해군 대저면이라고 거기 조그만 비행장이 있었는데, 거기 미군비행기가 못 내려요. 조
그마니까. 거기 확장공사 활주로 하는데, 그 노동자를 모집을 하는 데, 열아홉 살부터
하게 돼 있거든. 나는 열일곱 살인데 밤 겨울이니까. 거기 밤 5시에 형체를 알 수가 없
잖아 어두우니까. 일주일을 일을 하는데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 굉장히 힘들어요. 뭐
돌… 그리고 그냥 일 시키는 게 아니라 일을 안 하면 흑인들이 완장차고 소리 지르고…
일주일 도저히 병이 날 정도고, 너 나오지 말라고 옆에서. 너 나오지 말라고 네가 할 일
이 아니라고. 뭐 그런 일도 있었죠. 굶는 일이 허다했죠.
(이경찬) 9.28 수복되어서 환도를 해서 집으로 돌아왔잖아요. 그때는 지가 증권도 다
떨어졌을 때야. 그래서 우리가 살던 집, 행랑방 세주고, 사랑방 세주고, 건넌방 세주고
그런거 다 하고, 돈 다 떨어지면 꾸고. 그것도 안 되면 어머니가 그때 아버지 친구들 중
에 정부 요인들이 많았어요. 정당에도, 자유당이 집권당이었을 때 거기에도 아버지 친
구들이 자유당 당사에 청소부로 어머니를 주선해서 청소부로 다니시고… 그렇게 살았
죠. 그런대로 그 덕분에 우리가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다가 내가 이제
고등학교 졸업하고 결국은 집이 부채에 넘어가게 됐어요. 그래서 이사를 하게 됐어요.
홍릉. 여기 홍릉 주택공사에서 지은 부흥주택이라고 있는데, 보증금이 5만원인가? 그
정도 밖에 재산이 없었어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호적 정리
<1996년에 실종신고를 하여 제적됨.>
문_ 호적 정리는 어떻게 하셨나요?
답_ (이경찬) 실종선고를 받아서 아버지는 제적이 됐죠.
문_ 어머님은 돌아가셨고, 나머지 형제분들은 다 지금 살아계시죠?
답_ (이영찬) 그럼요.
문_ 어머님이나 숙부님 살아 계실 때 아버님에 대해서 얘기하셨던 것이 있나요?
답_ (이경찬) 늘 얘기하셨던 게 고생하실 때, 왜 애들만 들여보내지, 왜 되돌아왔느냐
고…
(이영찬) 얼마나 고생하셨길래… 이 사람 나쁜 사람이라는 거야. 그런 말씀을… 얼마나
한이 맺혔기에 그런 말씀을 하셨겠어.

연좌제 피해
<없었음. 아마도 아버지 동료들이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추측함.>
문_ 연좌제 피해는 있었나요?
답_ (이경찬) 연좌제에 대해서 불편했다든지 누가 소재를 추적한다든지 그런 건 없었어
요. 없었고, 안희경 씨라고, 법률 비서관이 나중에 조달청장이 됐거든요. 그분이 1년에
쌀을 한 가마니씩 계속 대주고, 그런 걸로 우리 가족을 보호해 준, 우리는 알지는 못하
지만 그런 게 있지 않았나…

정부에 바라는 말
<우리 죽기 전에 유골이라도 모시고 싶음. 6·25전쟁 민간인 납북사건은 북한정권이 전쟁
시 대규모로 자행한 전쟁 범죄인 만큼 정부는 북한에게 그 법적 책임을 묻고 문제 해결을
위해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대책을 수립해야 하며 북한에 법적인 책임을 추궁함으로써 정
의를 세워야 함. 국회는 2010년 3월 ‘6·25전쟁납북피해특별법’제정을 통해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발생 후 오랜 시간이 경과했다하더라도 국민
의 생명보호가 국가기본책무임을 확인하였음.
특별법에 의해 설치된 ‘6·25전쟁납북피해진상조사위원회’는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조
사보고서」에 북한에 의한 전시 민간인 납북은 범죄 행위가 명백하며 그 증거는 충분하므
로 북한은 납북 범죄를 시인하고 납북 피해 당사자 및 가족에게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고
정부는 자국민 보호 차원에서 전시납북자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다각적 노력을 전개
할 것을 권고하고 있음.>
(이영찬) 뭐 유골이라도 우리가 모셨으면 하는 게 큰 바람이죠, 우리 죽기 전에.
(이경찬) 그 지금 종전 선언, 6·25 전쟁을 끝내자는 종전 선언이 화두가 되고 있잖아요.
그런데 전쟁을 끝내는데 전제로 해야 하는 게, 전쟁으로 피해 받은 자기 국민들, 인적인
문제, 그것이 의제화되야 되는데, 그걸 정부가 의도적으로 무슨 이유든지 그것을 회피
하고 있단 말이에요. 이것은 정부의 자국민 보호가 정부의 기본 책무인데, 그걸 회피하
고 있다. 그 법적인 책임은 이 정부가 책임을 짊어져야할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갖
고 있어요. 이 활동을 하면서.
문_ 가족회가 원하는 게 뭘까요?
답_ (이경찬) 그 가족들(가족회)이 공감하는 부분만 얘기를 해야죠. 가해자에 대해서
그 법적인 책임, 이거는 끝까지 추궁을 해야 하지 않나. 국제사회에서도 그거를 여러모
로… CIA문건이나 한국전쟁범죄KWC141문건, UN COI 보고서 등 미 의회나 외국에
서도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런 방향으로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거를 저희가 원하
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는 유야무야 될 사항이 아니다. 이건 끝까지 짚고 넘어가야 될
문제다. 피해 회복은 지금 거의 힘들거든요, 어떻게 피해를 회복해 줄 거예요? 그러나
이 정부가 얘기하는 정의, 이거를 제대로 법적인 책임을 추궁함으로써 정의를 세워야 된
다. 이게 가족회에 계속 관여해오면서 얻은 결론이거든요. 아무것도 없어요. 뭐 다른 가
족들은 우리 정부에 대해서 보상을 뭐 이러는데. 그거는 사적인 이익을 위한 거지, 공적
인 거는 내가 얘기한 거예요.
(이영찬) 정의가 세워지겠어요? 지금 이 정부에서? 이건 뭐 통일이 되는데, 이북 북한까
지 태극기가 걸려야 해결될 문제예요. 난 절대 안 된다고 봐. 그래서 우리는 계속 주장
을 해야겠지만, 저쪽 노선은 한 번도 바뀐 게 없잖아.
(이경찬) 지금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형사소추 할 수 있는 법적인 장치가 우리 국내법
에 다 있거든요. 그런 장치가 다 있으면서도 외면한다는 건 부작위에 의한 책임을 져야
된다는 거죠.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던 아버지의 마음을 명심하고 그 정신을 아이들도 이어가도록 하
고 싶음.>
답_ (이경찬) 지금 이제 우리가 나이가 먹어서 생각되는 건 아버지가 애들을 살리기 위해
서 충분히 본인의 앞날이 보장된 지위에 있으면서도 그거를 다 버리고. 그 한강 다리 건
넜으면, 어머님 말씀대로 애들 들여보냈으면 그대로 다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러니까 아
버지는 자기 직업이 그러니까 직업이 검사니까 이 빨갱이들이 얼마나 잔악한지 아니까
가족들의 안위가 걱정이 되서 못 내려갔지. 피하지 못한 거거든요. 아버지의 마음을 우
리가 명심하고 애들한테 전하고, 그 정신을 애들한테 이어가도록 그렇게 하고 싶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아버지의 뜻을 우리가 알았으니까.
(이영찬) 아버님이 그렇게 허망하게 되셨는데 그래도 우리 못난 자식들 때문에 아직 못
찾으신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 같은 나 같은 사람들이 정부에 무관심한 사
람들이 많은 거야. 죄인 같아. 할 얘기는 많은데 별로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6·25 나
고 혼란 통에 이 정부가 이 문제를 소홀히 했잖아요. 그때는 시대적인…
(이경찬) 전후 복구문제, 그런 사정이 다 있었잖아요. 지금은 그런 문제가 다 해소됐잖
아. 그런데도 안 하고 있다는 건 그건 직무유기죠 뭐.
(이영찬)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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