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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이선재 (증언자-이정숙)
이름: 관리자
2016-12-13 11:12:46  |  조회: 2254

2009. 4. 8 채록

090408A 이 선 재(李善宰)


피랍인

생년월일: 1902년 3월 7일

출생지: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 1가 357번지

당시 주소: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 1가 357번지

피랍일: 1950년 7월 13일

피랍장소: 자택 근처 노상으로 추정

직업: 서울고등법원 판사

학력/경력: 고려대 법학과 졸업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3남 4녀

외모/성격: 180cm의 건장한 체격, 가정적인 가장


피랍정보등재명부

1954 √

1956 √


증언자

성명: 이정숙(1928년생)

관계: 차녀

증언성격: 간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 서울고등법원 판사로 있던 피랍인은 전쟁 발발 후 처가가 있는 경기도 광주로 피신을 했다가 아내의 생일날 잠시 서울 자택에 들러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 이튿날인 7월 13일 동료 판사들을 보고 온다며 나간 후 돌아오지 못함.

- 피랍인이 서대문형무소, 평양형무소를 거쳐 강계까지 끌려갔다는 소식을 함께 있다가 평양에서 탈출해 온 계광순씨를 통해 가족이 직접 전해 들음.


“거기서 방공호를 파고 한 20일 계시다가, 그 때 우리는 집에 있고 아무런 연락을 못 하니까 아버지가 어머니 생신(7월 12일)이라고 오셨어요. 어머니 생신 밥 잡수시고 다음날, 여기 온 김에 동료 판사 몇 분 보러 가신다고 집에서 나가시는데 뭐라 그러셨냐면, ‘내가 오늘은 나가지 않았으면 좋은데, 안 나갔으면 좋은데, 기분이 덜 좋아.’ 그래요. 그래서 어머니가 나가기 싫으시면 나가지 마시지 왜 나가시냐고, 그래서 나는 어머니하고 아버지, 셋이 이렇게 앉아 있다가 ‘아버지, 그럼 가지 마세요.’ 이랬거든. 옷은 여름이니까 베옷에 고쟁이 입으시고 밀짚모자 쓰시고, 빨리 갔다 온다고 하고 나가시더니 저녁때가 돼도 안 오세요.”


“아버님 소식을 들었다고, 죽이지 않고 평양에서 강계까지 도보로 끌려가셨다고 해서 오빠하고 나하고 계동 계광순씨댁에 가서 직접 그 분을 만났어요. 우리 아버지가 이선재라고 그랬더니 그 얘길 다 하대요. 서대문형무소에 같이 있다가 감방을 바꿔서 헤어졌다가 평양형무소에서 강계가는 데는 같이 갔대요. 그래서 도중에 도망가자고 했더니 우리 아버지는 체격이 크고, 계광순씨는 우리가 가서 만나보니까 조그마하시고, 말씀하시는 게 단단한 분이더라고. 그래서 아버지는 겁이 나서 못가니까 재판소 가서 서기 통해서 내가 살아있다는 걸 집에 전해달라고 그랬대요. 그래서 서기가 우리 김장하고 있는데 와서 전해줬어요. ”


○ 직업 및 활동

<서울고등법원 판사>

문_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답_ 서울고등법원 판사로 계셨어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인천재판소, 수원재판소에 계시다가 해방되고 춘천재판소 지방법원 판사로 계셨다가 고등법원 판사로 승진하셨어요. 재판소 근무만 쭉 하셨어요.


○ 납북 경위

<6․25전쟁이 발발하고 서울고등법원 판사였던 피랍인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처가가 있는 경기도 광주에서 20여일 피신해 있었음. 7월 12일 배우자의 생일날 잠시 자택에 와서 식구들과 식사를 하고 이튿날인 13일 온 김에 동료 판사들을 보고 오겠다며 나간 이후 돌아오지 못함. 이후 피랍인과 함께 잡혀 있다가 평양에서 탈출해 온 계광순씨를 통해 피랍인이 서대문형무소, 평양형무소를 거쳐 강계까지 도보로 끌려갔다는 것을 확인함.>

문_ 어떻게 납북이 되셨는지?

답_ (아버님은) 6․25전쟁이 나고 경기도 광주 외갓집에 피신해 계셨어요. 거기서 방공호를 파고 한 20일 계시다가, 그 때 우리는 집에 있고 아무런 연락을 못 하니까 아버지가 어머니 생신이라고 오셨어요. 어머니 생신 밥 잡수시고 다음날, 여기 온 김에 동료 판사 몇 분 보러 가신다고 집에서 나가시는데 뭐라 그러셨냐면, ‘내가 오늘은 나가지 않았으면 좋은데, 안 나갔으면 좋은데, 기분이 덜 좋아.’ 그래요. 그래서 어머니가 나가기 싫으시면 나가지 마시지 왜 나가시냐고, 그래서 나는 어머니하고 아버지, 셋이 이렇게 앉아 있다가 ‘아버지, 그럼 가지 마세요.’ 이랬거든. 옷은 여름이니까 베옷에 고쟁이 입으시고 밀짚모자 쓰시고, 빨리 갔다 온다고 하고 나가시더니 저녁때가 돼도 안 오세요. 어머니 생신이라고 과일 사놓은 거 아버지 드리려고 놔뒀는데, 그 이튿날도 안 오시고 며칠 놔둬도 안 오셔서 사방에 연락해도 연락을 할 데가 없어. 그러니 어디서 붙들리셨는지도 몰라요. 집에서 나가실 때, ‘난 안 나갔으면 좋은데’ 이러시고 나가셨다고. 그건 어머니도 듣고 나도 듣고.

문_ 그 때가 언제인가요?

답_ 7월 13일이에요. 어머니 생신을 7월 12일에 지내고, 7월 13일에 커다란 부채 드시고, 밀짚모자 쓰시고 (나가셨어요). ‘빨리 갔다 올께’ 그러고 나가셨는데, 동네 길에서 누가 판사라고 밀고해서 붙들려 가셨는지 알 수가 없어요.

문_ 납북되신 건 어떻게 아셨어요?

답_ (평양에서 탈출해 온) 계광순씨 있죠. 아버지하고 평양형무소에 같이 잡혀 있었는데, 9월 28일에 여기서 폭격했잖아요. 9․28폭격, 그 때 평양형무소에서 강제로 다 이동했대요. 그 분은 평양에서 탈출해 오셨는데 우리 아버지는 걸어서 강계까지 끌려가셨다고 계광순씨한테 얘기를 들었어요.

문_ 계광순씨를 어떻게 만나셨어요?

답_ 아버지하고 같이 일하던 고등법원 서기하던 분이 연락을 받았다고 성수동 우리집에 와서 전해줬어요. 아버님 소식을 들었다고, 죽이지 않고 평양에서 강계까지 도보로 끌려가셨다고 해서 오빠하고 나하고 계동 계광순씨댁에 가서 직접 그 분을 만났어요. 우리 아버지가 이선재라고 그랬더니 그 얘길 다 하대요. 서대문형무소에 같이 있다가 감방을 바꿔서 헤어졌다가 평양형무소에서 강계가는 데는 같이 갔대요. 그래서 도중에 도망가자고 했더니 우리 아버지는 체격이 크고, 계광순씨는 우리가 가서 만나보니까 조그마하시고, 말씀하시는 게 단단한 분이더라고. 그래서 아버지는 겁이 나서 못가니까 재판소 가서 서기 통해서 내가 살아있다는 걸 집에 전해달라고 그랬대요. 그래서 서기가 우리 김장하고 있는데 와서 전해줬어요. 그래서 오빠하고 나하고 계동에 가서 탈출하신 계광순씨를 직접 만났죠.

그러니까 아버지는 묶여서 거기까지 가셨으니까. 누구는 여기서 죽고 아리랑고개 넘다가 죽고 어디 사리원에 가다가 죽고 그랬다는데, 그 때까지는 이렇게 수갑을 한쪽 팔만 찼대요. 둘씩 이렇게. 그렇게 살아서 강계까지 붙들려 가신 건 우리가 알지. 아버지가 집을 나가시고 동네 빨갱이가 판사라는 걸 알아서 뚝섬서 잡혔나, 어디를 가서 잡혔나, 그건 모르지만 잡혀가신 건 확실히 계광순씨가 얘기를 해서 알았어요.


○ 납치이유

<판사직으로 고위층이었으며, 부르주아로 여겨 납치되었을 것으로 생각함.>

문_ 왜 납치되셨다고 생각하세요?

답_ 우리는 아버님이 판사를 하시고, 그 때 당시 얘기하는 부르주아, 공산주의 사회에서 보면 부자로 산거죠. 돈이 있어 넉넉히 살고 공산사상을 찬양 안하는구나. 그러니까 계급 높은 사람들 다 붙들려 가는데 갔구나. 붙들려 가셨을 때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죠.


○ 납치 후 소식

<강계까지 같이 끌려갔다가 탈출해 온 계광순씨를 통해 들은 소식 이후 다른 소식은 없음.>

문_ 이후에 다른 소식은 없었는지?

답_ 통 못 들었어요. 아버지는 강계까지 살아계셨으니까 금새 통일이 돼서 돌아오실 거라 생각했죠. 그 때까지 안 죽였으면 아버지는 돌아오실 팔자인가보다 하고, 내가 그 때 스물두 살이었는데 집에서 시집가라고 하면 아버지가 풀려나서 오시면 간다고 그랬어요. 그러고 시집을 서른둘에 갔어요.

문_ 소식을 들었을 때 가족들은 아버님이 살아 돌아오실 거라고 생각하셨군요?

답_ 죽이지 않고 묶여 갔다고 하니까. 서대문형무소에서도 죽이고 미아리에서도 많이 죽였다고 하고, 그런 얘기가 많았어요. 그러니까 죽이지 않고 끌고 가서 뭐에 써먹으려고 그러나, 언제쯤 풀어주려고 하나 (그렇게 생각했죠), 우리가 공산체제에 대해 잘 몰랐지.


○ 남은 가족의 생활은?

<한강 교전 때 피랍인의 맏며느리와 손자, 딸 둘이 폭격으로 사망하고 경동고등학교 교사로 있던 장남은 전쟁 중에 유엔 통역관으로 나감. 피랍인의 차녀가 미군에서 회계 지배인으로 있으면서 가계를 돌보고, 피랍인이 돌아올 것이라 기대하며 10년을 기다리다 32세에 느지막이 결혼함.>


문_ 전쟁 중에 다른 가족들의 피해는 없었나요?

답_ 우리 식구들 거의 다 죽었어요. 그 때 폭격 맞아서. 6․25 나고는 외갓집으로 피난 갔다가 1․4후퇴 때는 무서우니까 조금 더 멀리 갔어요. 수원 쪽으로 갔다가 식량이 떨어져서 차차 잠실, 유엔군 있는 데까지 왔는데, 거기서 올케도 죽고 조카도 죽고, 경기여고 다니는 여자동생, 여섯 살 난 조카, 다른 조카 하나는 잃어버렸다가 나중에 찾았어요. 군의관이던 유엔군이 데리고 양색시한테 맡긴 걸 오빠가 나중에 찾았어요.

오빠의 아들이지. 네 살 때인데 아버지가 선생님이고 할아버지는 판사라고 했대. 그 얘기를 동네사람이 듣고 우리 식구들 화장하고 그러는데 와서는 손주가 있느냐고, 네 살 난 사내아이가 한복에 색동마고자를 입었단 얘기를 해요. 그래서 그럼 우리 아들이다, 그래서 오빠가 그 사단 찾아가서 혜화동에서 양색시가 데리고 있는 걸 찾아 왔어요. 벌써 전쟁이 나고 그 애를 봄에 찾았으니까, 폭격은 정월달에 있었고 4개월 만에, 오빠는 유엔 통역관으로 나가 있었으니까 걔는 아빠를 반년동안 못 본거죠. 철모를 쓰고 오빠가 ‘승규야!’ 이렇게 부르니까 거기서 애들하고 노는데 오빠를 몰라보더래. 그래서 철모를 벗고 ‘승규야!’ 그러니까 ‘아버지!’ 하고 오더래. 그래서 찾았어. 그게 무슨 운명인지.

그 때 남은 식구는 어머니하고 나, 지금 막내 남자동생하고 경기고등학교 다니던 남동생, 걔는 그 때 국군으로 가서 살아남았어요. 그리고 조카, 조카는 내가 업고 다녔으니까. 쌀 싣고 가던 지게에다 쌀 떨어지고는 조카를 지고 다녔어요. 오빠는 유엔 통역관으로 가서 살고. 6․25 때 아버지가 붙잡혀 갔으니까, 어머니 모시고 식구들 책임지고 갈 수 있냐고, 오빠는 교편생활해서 영어가 되니까 나가야 된다고 해서 유엔 통역을 나가고, 내가 책임지고 가족들 인솔해서 다닌다고 했는데 잘못돼서 그냥. 양식이 가다가 떨어지고, 가도 가도 중공군이야. 우린 도보로 가고 걔네들은 말을 타고 다니는지 말도 많고 그 때 그랬어요. 그 때 한강 교전 때 거기서 다 죽었어요. 올케, 조카, 여동생 둘, 아휴.

문_ 이후에 생활은 어땠나요?

답_ 아유 말할 수 없죠. 제가 서른이 넘도록 시집도 안 가고, 오빠네 생활 다 도와주고 그랬어요. 그 때 경동고등학교 교사 월급이 얼마나 돼요. 식구는 어머니 나, 남동생 하나는 군인으로 나가 있다가 나중에 들어오고, 다른 남동생 하나, (오빠가 재혼해서 들어온) 올케, 조카들 일곱, 여덟 식구니까 생활비가 부족했죠.

문_ 당시에 어떤 일 하셨어요?

답_ 은행에 있었으니까 주판을 잘 놨어요. 그렇게 가족이 죽고는 겁이 나서 전라도 이리까지 갔는데, 은행에서 일한 경력이 있어서 피난민 반장, 식량 배급, 회계를 다 보면서 쌀 배급을 타서 식구들 먹이고 그랬어요. 그렇게 서울 수복되고는 미군 계통 회계 일을 보면서 지배인 코스 시험을 봐서 회계 지배인도 했어요. 그렇게 해서 월급을 많이 받아서 다 오빠네 도와주고, 서른두 살까지 나는 아버지 안 오시면 시집 안간다고 그랬어요.


○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신고는 하셨나요?

답_ 내가 대한적십자사에 신고했어요.

문_ 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답_ 밀린 봉급도 주고 그래야 하는데, 그런 거 없었어요.


○ 호적정리

<실종신고 후 사망으로 처리됨.>

문_ 호적정리는 하셨나요?

답_ 그건 오빠가 잘 알고 나는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내가 등본을 떼니까 아버지가 나오는데 사선이 그어져 있었어. 그러니까 돌아가신 걸로 됐나봐. 신고는 실종신고로 했을 것 같아요. 오빠가 6․25 나고 한참 정리를 못하게 했어요. 우리는 전쟁이라는 게 남북통일이 돼서 끝나면 도로 (아버지를) 보내줄 거라고 (생각했지). 너무 몰랐지. 공산당을 너무 몰랐지.


○ 연좌제 피해

<없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없었나요?

답_ 그런 건 하나도 없었어요.


○ 정부에 바라는 말

<공무원 가정에 대한 보상 및 지원, 피랍인 유해 송환>

문_ 정부나 사회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답_ 그래도 (아버님은) 판사로 현직에 그렇게 계셨는데 월급은커녕 아무 것도 없이, 물론 우리만 그랬다면 무슨 증명이라도 해서 우리가 받았겠지만, 그 때는 다들 그랬으니, 지금이라도 국가에서 그 부분에 대해서 뭔가를 해줘야 될 것 같아. 6․25전쟁 때 미국대사관에 근무했던 내 친구는 붙들려 갔다가 금새 나왔어요. 우리집에 살던 내 동기 동창이었는데, 어머니 모시고 친구가 참 착하다고 우리 아버지가 바깥채를 세도 안 받고 빌려줬어요. 그렇게 풀려나와서는 바로 보따리를 싸가지고, “정숙아, 나 나간다.” 그래요. 그래서 뭐라 그러고 나왔냐고 했더니, 같은 대사관에 있는 사람을 데려오라고 그랬대. 그래서 내일 아침에 데리고 온다고 하고 나왔는데 그 날 밤에 이불만 가지고 이사 갔어요. 그런데 그 친구는 9․28 되고, 미국대사관에서 3개월 치 월급을 주더라고. 그래서 내가 우리나라는 가난해서 아버지 월급도 못 주는구나 그랬어요.

내가 죽기 전에 통일이 돼야, 살아계신다 해도 이제 백 살이 넘으셨으니까, 돌아가셨으면 어디 형무소에서 (돌아가셨는지), 어디에 파묻었다면 어디다 묻어놨는지, 그거라도 우리가 죽기 전에 알아야지. 오빠하고 나 하고 죽기 전에. 여기서 (개인이) 발굴하러 갈 수도 없고. 그런 거라도 알면 좋겠어요. 법조계는 어디로 어떻게 보냈는지, 그런 거라도 알았으면, 무슨 소식이라도 들어야지.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문_ 납치되어 가신 아버님께 하고 싶은 말씀해 주세요.

답_ 아버지, 아버지께서 오빠와 저를 잘 교육 시켜 주시고 잘 길러주셔서 지금 저희 형제들과 조카들, 다 잘 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그렇게도 보고 싶은 (아버지), 정숙이에요. (눈물)

어머님은 저희가 잘 모셔서 돌아가신지 20년 됩니다. 더 멀리 피난가시지. (눈물) 아버지, 정말 보고 싶어요.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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