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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채록

납북자-김형배 (증언자-김종무)
이름: 관리자
2013-10-02 12:18:23  |  조회: 2581
첨부 : 66.080704A 김형배.hwp  
2008. 7. 4. 채록
080704A 김 형 배 (金滎培)

피랍인
생년월일: 1894년 2월 21일생
출생지: 서울시 용산구 산천동 187번지
당시 주소: 서울시 마포구 창전동 403번지
피랍일: 1950년 7월 21일
피랍장소: 자택
직업: 농업,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마포구 추진위원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4남 1녀
외모/성격: 큰 키에 강직한 성격

증언자
성명: 김종무(1935년생)
관계: 4남
증언성격: 간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 반동분자의 집으로 몰려 가재도구와 양식을 빼앗기고 동네에서 핍박을 많이 받음.
- 7월 21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마포구 추진위원으로 활동하던 피랍인은 가족이 걱정되어 피난을 가지 않고 자택으로 돌아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내무서원에 의해 연행됨.
- 차남은 의용군으로 끌려가고 포로교환 때 송환되었으나 정신이상이 되고, 3남은 포탄 파편에 맞아 장애인이 되는 등 전쟁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으며 전쟁 이후에도 정보과 형사의 감시 속에 지냄.
-피랍인의 부인은 1.4후퇴로 피난 가 있던 중 홧병으로 사망.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인 명예 회복

“아버지를 모시고 대구로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그걸 반대하신 거야. 서울 집에 가족들이 다 있는데 자기만 살겠다고 큰 아들 따라서 피난을 가 버리면 안 되니까, 죽어도 가족들하고 같이 죽어야 되겠다고. 그 당시만 해도 공산당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모르신거야, 아버지는. 그 날, 납치당해 가신 날이 1950년 7월 21일인데, 7월 21일 오후에 올라오신 거예요. 우린 모르죠. 아버님이 하얀 두루마기, 옛날 독립 운동 한 사람들은 김구 선생님 마냥 하얀 옷을 입고 다니셨다고. 그렇게 하고 집에 들어오셨는데, 뒤에서 그 사람들 두 명이 쫓아 들어와서 모시고 간 거예요. 그 길로 단숨에 마포경찰서로 쫓아갔는데 아버지는 못 만나고 앞에 다른 가족들이 이렇게 있는데 한 시간 전에 트럭으로 열 트럭 실어서 갔다고,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게 끝이에요.”

“아버님이 납치돼 가실 때 우리 동네에서 세 사람이 같이 끌려갔다는데 그 중에 한 분이야. 모르게 나를 불러낸 거예요. 자기가 이렇게 살아서 온 걸 알면 총살을 당하니까 절대 비밀로 하라는 거예요. 어떻게 왔느냐고 했더니, 6.25 때 폭격이 참 심했어요. 비행기 뜨고 폭격이 심해서 이 사람들이 열 트럭을 끌고 이북까지 다 가질 못했나봐. 그걸 피해 포승줄에 엮어서 젊은 사람, 나이 먹은 사람, 이렇게 구분해서 끌고 가는데 자기가 끌려가던 그 차도 안 되니까 산에다 놓고 기관총으로 막 휘둘러 가지고, 자기 쪽으로 이렇게 휘두르는데 그냥 쓰러졌다는 거야. 죽은 척하고 그냥 이렇게 엎드려서 3일을 있었다는 거야. 고개를 들면 누가 찌를 것 같아서. 그냥 비는 오고, 사람이 죽으니까 냄새가 나잖아. 그래도 꼼짝을 못 하고 굶고 묶인 그대로 3일을 엎드려 있었는데, 자기는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고개나 들어보자, 그러고 꿈틀거렸나봐. 그랬는데 아무 인기척이 없으니까 ‘아, 이제 됐구나.’ 그래서 거기서 풀려 나온 거야. 구사일생으로 살았지.

○ 직업 및 활동

<농사일을 하며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마포구 추진위원으로 활동>

문_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답_ 그 당시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있어요. 거기 마포구 추진위원을 하셨어요. 그것 때문에 납치를 당해 가신거야.

문_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어떤 일을 하던 단체인가요?
답_ 그게 그 때 당시에 설립된 건 아니고 우리나라가 독립이 안 되었을 때부터 있었는데 일종의 독립운동을 하던 곳이죠.

문_ 경제 활동은 어떻게 하셨어요?
답_ 농업을 하시면서 집에 있었으니까, 농사를 지어 가시면서 나머지 시간에 그걸 하신거지.



○ 납북 경위

<충북 영동에서 사업을 하던 아들에게 가 있다가 전쟁이 나자 가족이 걱정되어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으로 올라왔으나 그 날 바로 기다리고 있던 내무서원들에 의해 연행됨. 마포경찰서로 찾아갔으나 이미 열 트럭에 모두 실어 끌고 갔다는 내용을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접함. 이후 도중에 살아 온 이웃이 피랍인의 아들을 찾아와 트럭에 실려 함께 북으로 끌려가다 폭격으로 이동이 힘들어지자 일부는 도중에 사살되고 나머지는 북으로 끌려갔다고 전함.>

문_ 어떻게 납북이 되셨는지?
답_ 이북 사람들이 서울에 남침해 왔을 적에 우리는 소위 말해서 반동분자로 몰려 있었어요. 자기네들한테는 우리가 원수야. 그래서 우리가 핍박을 많이 받았어요. 가재도구고 뭐고 있는 거 다 뺏기고, 아무 것도 먹고 살 수가 없으니까 어머니하고 나하고 외가에 식량을 얻으러 갔어. 우리 외가가 지금으로 말하면 성산동, 마포 성산동이 옛날엔 시골이야. 그 때 집에는 우리 누님이 한 분 계셨는데 몸이 불편해서 걸음을 못 걸으셔. 그래서 집에 계셨고, 어머니하고 나하고는 가서 쌀을 얻어 가지고 집으로 왔죠. 그 때 아버지는 6.25가 나고 충북 영동에 계셨어요. 큰 형이 거기서 광산을 했어요. 6.25가 나기 전에 아들이 사업을 하니까 아버지가 거길 가셨다가 6.25가 터져서 못 올라 오셨는데, 전쟁이 나서 형님은 그걸 정리하고 종군기자로 가면서 아버지를 모시고 대구로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그걸 반대하신거야. 서울 집에 가족들이 다 있는데 자기만 살겠다고 큰 아들 따라서 피난을 가 버리면 안 되니까, 죽어도 가족들하고 같이 죽어야 되겠다고. 그 당시만 해도 공산당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모르신거야, 아버지는. 그 날, 납치당해 가신 날이 1950년 7월 21일인데, 7월 21일 오후에 올라오신 거예요. 우린 모르죠. 아버님이 하얀 두루마기, 옛날 독립 운동 한 사람들은 김구 선생님 마냥 하얀 옷을 입고 다니셨다고. 그렇게 하고 집에 들어오셨는데, 뒤에서 그 사람들 두 명이 쫓아 들어와서 모시고 간 거예요. 우리가 외가에 가서 쌀을 얻어 가지고 오니까 누님이, 아버지가 시골에서 올라 오셨는데 얘네들이 붙잡아 갔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무서로 갔는데 한 30분 전에 마포경찰서로 이송됐다고 그러더라고요.

문_ 마포경찰서에서 아버님을 만나셨어요?
답_ 그 길로 단숨에 마포경찰서로 쫓아갔는데 아버지는 못 만나고 앞에 다른 가족들이 이렇게 있는데 한 시간 전에 트럭으로 열 트럭 실어서 갔다고,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게 끝이에요.

문_ 동네에 끌려간 다른 이웃이 있었나요?
답_ 납치되어 가신 지 일주일에서 한 열흘 정도 됐는데 신천로터리에서 누가 나를 찾는다고 그러더라고. 아버님이 납치돼 가실 때 우리 동네에서 세 사람이 같이 끌려갔다는데 그 중에 한 분이야. 모르게 나를 불러낸 거예요. 자기가 이렇게 살아서 온 걸 알면 총살을 당하니까 절대 비밀로 하라는 거예요. 어떻게 왔느냐고 했더니, 6.25 때 폭격이 참 심했어요. 비행기 뜨고 폭격이 심해서 이 사람들이 열 트럭을 끌로 이북까지 다 가질 못했나봐. 가는 도중에 폭격이 있으니까 그걸 피해 포승줄에 엮어서 젊은 사람, 나이 먹은 사람, 이렇게 구분해서 끌고 가는데 자기가 끌려가던 그 차도 안 되니까 산에다 놓고 기관총으로 막 휘둘러 가지고, 자기 쪽으로 이렇게 휘두르는데 그냥 쓰러졌다는 거야. 죽은 척하고 그냥 이렇게 엎드려서 3일을 있었다는 거야. 고개를 들면 누가 찌를 것 같아서. 그냥 비는 오고, 사람이 죽으니까 냄새가 나잖아. 그래도 꼼짝을 못 하고 굶고 묶인 그대로 3일을 엎드려 있었는데, 자기는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고개나 들어보자, 그러고 꿈틀거렸나봐. 그랬는데 아무 인기척이 없으니까 ‘아, 이제 됐구나.’ 그래서 거기서 풀려 나온 거야. 구사일생으로 살았지. 그래 가지고 우리한테 연락을 한 거야.

문_ 누가 아버님을 끌고 갔나요?
답_ 내무서원들이 소위 말해서 치안 하는 사람들이래. 그 당시만 해도 인민군은 지방 사정을 모른다고. 지방 빨갱이들이 다니면서 '저 사람 뭐 한 사람이다', '이 사람 뭐 한 사람이다' 그렇게 그 사람들이 정보를 제공을 해서 내무서원들이 끌고 간 거예요.

문_ 누님은 직접 목격하셨어요?
답_ 누님은 방에 있었는데 아버님 기침 소리가 나고 “얘, 이거 봐라.” 하는 소리가 있어서 내다 봤더니 어떤 남자 둘이 이렇게 끌고 가더래요. 누님은 장애가 있어서 쫓아 갈 수도 없고, 이제나저제나 오기만을 기다렸죠.



○ 납치이유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마포구 추진위원을 지낸 것>



○ 납치 후 소식

<같이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 이웃이 전해준 소식 외에 다른 소식은 없음.>



○ 남은 가족의 생활은?

<반동분자로 괴롭힘을 많이 당해 집도 잃고 이사를 하게 됨. 전쟁 발발 후 피랍인의 장남은 종군기자로 가고 차남은 인천상륙작전으로 교전이 심할 때 대포 파편에 맞아 불구가 됨. 3남은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1953년 포로교환 때 집으로 돌아왔으나 심한 구타를 당해 정신이상 상태가 됐으며, 이후 피랍인의 부인은 1.4후퇴 때 대구로 피난 갔다가 홧병으로 사망함.>

답_ 우리는 거기서 살 집도 없었지만 거기서 살지를 못했어요. 반동분자라고 너무 괴롭혀서. 그 당시에 식구라고는 어머니하고 누이하고 다친 형하고 나밖에 없는거야. 반동으로 몰려서 마포에서 살 수가 없으니까 용산 남영동으로 이사를 갔죠. 옛날에 우리 큰 형 집이 거기 있었어요. 그래서 그걸 두고서 다른 일을 했기 때문에 그 집에 가서 살다가 1.4 후퇴 만나서 남영동에서 대구로 가족은 내려가고 나는 군대로 뛰어 들어간 거지요.

문_ 가족 중에 다른 피해가 있었나요?
답_ 둘째 형님이 의용군으로 끌려갔어요. 기록을 보니까 9월 20일에 끌려갔다고 되어있는데 나는 끌려간 것만 알고 있었지. 걔네들에게는 반동집이니까 아주 씨를 말리는 거야.
그리고 1953년도인가 이승만 대통령이 10만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시켜버렸어. 그 때 의용군으로 끌려갔던 형님이 대구 영천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종군기자로 있던 형님하고 나하고 집으로 모시고 왔는데 그 양반이 나갈 때하고 돌아올 때 사람이 완전 딴 사람이 되었더라고. 막 정신이 이상해져서 왜 그러냐고 하니까 매를 많이 맞았다고 그러더라고. 우리집이 반동분자 집이고 아버지가 그랬기 때문에 끌려가서 가만히 놔두질 않았나봐. 하도 많이 맞아서 모자란 사람같이 되어버렸더라고.

문_ 셋째 형님은 전쟁 중에 장애인가 되셨어요?
답_ 그 형은 9.28수복할 때 다쳤어. 맥아더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해서 들어오면서, 지금 연세대가 있는 거길 연희궁이라고 그랬는데 거기하고 인천하고 교전을 벌였어. 그 때 서강이라는 데가 그 사이에 있는 동네야. 그래서 포탄, 유탄에 맞아서 병신이 된 거야. 대포 파편에 맞은 거야. 그래서 이 엉덩이 이게 완전히 없어. 살이 그냥 다 날아갔어. 집이 불타고 없어질 정도로 했으니까.

문_ 어머니는 어떠셨어요?
답_ 어머니가 화병이 나셔서 돌아가셨어요. 영감님 그렇게 됐지. 아들 그렇게 됐지. 작은아들 병신됐지. 제 집 없어졌지. 그러니까 노인네가, 그 때 어머니 나이가 60 이었어. 홧병이 나서 대구에 피난 갔다가 돌아가신 거야.

문_ 이후 생활은 어떻게 하셨어요?
답_ 내가 대구에 내려가서 장사를 했어. 그 땐 여름이라 아이스께끼 장사를 했어. 그래서 그걸로 돈 벌고 대구 시장 바닥에 가서 식구들이 다 장사를 하고 그렇게 벌어서 피난생활을 한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똑바로 교육을 못 받은 거야. 받을 여유도 없었고 그렇게 얼버무리다가 나는 그냥 군대 가 버린 거야. 그리고 큰형은 종군기자를 했으니까 거기서 나오는 걸로, 자기 가족하고 우리 누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불구된 형하고 다 큰형 밑에서 얹혀살았지.



○ 정부의 노력

<가족들 앞으로 나온 쌀 한 가마와 광목, 미군이 주는 원조품을 위로품으로 받은 적이 있음.>

문_ 신고는 하셨나요?
답_ 9.28 수복을 해서 서울이 잠시 탈환을 했을 때 우리 동에다가 신고를 했지. 그래서 그 때 동에서 가족들 앞으로 쌀 한 가마하고, 그 때는 옷이 없어서 이렇게 베로 짠 광목하고, 미군들이 주는 원조품을 위로 차원에서 주더라고.



○ 호적정리

<6.25납북자로 호적정리>

답_ 6.25납북자로 호적정리를 했어.



○ 연좌제 피해

<정보과 형사가 한 달에 한 번 자택을 방문해 동정을 살피며 감시를 했음.>

답_ 많이 받았지. 나중에 수복돼서 종로 삼청동에 와서 살았는데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정보과 형사가 오더라고. 그러면서 “별일 없습니까?” 그래서 “별일 없습니다.” 그러고 가는데 처음에 우리는 국가에서 우리를 보호해주는 줄 알았어. 그런데 알고 보니까 아버지가 이북에서 우리하고 내통을 해서 소위 말해서 간첩행위를 하지 않나 하고 정부에서 우리를 감시를 한거야. 나는 자꾸 동정을 살피고 가는 걸 ‘아, 국가 차원에서 우리를 보호해주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 우리가 이북하고 무슨 교신을 해서 이남 정보를 주는지 그걸 감시하려고 했던거야. 그 때 내가 20대인데 나중에 내가 국회에서 일할 때 그걸 알았어.



○ 정부에 바라는 말

<피랍인 명예 회복>

답_ 내가 지금 바라는 건 연세가 많으니까 생존여부는 바랄 수가 없고, 당시 8만3천여 명이 이렇게 해서 납북을 당했고 그 가족들이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국가에서 정신적으로 예우가 있어야할 것 아닌가. 누가 이렇게 했다는 건 역사에 남겨야할 것 아닌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그렇게 됐으면 국가에서 이름이라도 남겨줘야 하는데 그런 것 마저 없으니까, 입법을 해서 국가 차원에서 이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할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야.
지금 이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주라는 건 아니야. 국가가 왜 외면을 하냐는 거야. 6.25를 만나서 이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다는 것, 저 수많은 분들과 그 가족들이 다 나같이 가슴아파하는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국가가 뭘 하고 있느냐는 말이야. 저 분들을 위한 뭐를 좀 만들어주라 이거야.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답_ 작년에 미국 워싱턴에서 우리 8만3천여 명 납북자들의 이름을 며칠에 걸쳐 호명을 했었어. 그 얘기를 듣고 나는 판문점에 갔어요. 아버지 함자를 A4용지에 써서 가시 철망에다 붙들어 매고 철조망을 붙잡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버지 이름을 몇 만 번을 불렀는지 몰라. 나 혼자 가서 그렇게 했어. 나는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 것 보다 자식의 도리를 다 못했다는 것, 내가 끝까지 가서 김일성 모가지라도 잘라 와야 되는데 그걸 못해서 아버지한테 죄송스럽다는 말 밖에 드릴 말씀이 없어. 지금 보고 싶다고 아버지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못한 자식을... (눈물) 그 영혼이라도 들으시라는 얘기야.

아버지, 저 종무입니다. 제가 그렇게 아침 새벽부터 밤늦도록 아버지 함자를 외쳤습니다. 혹 영혼이 살아있다면 아버지가 제 목소리를 들으셨을 겁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8만3천 명의 넋이라도 위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습니다. 8만3천 명의 영혼들이 저희들에게 힘을 실어주시면 저희가 그 분들을 위해서 생전에 무엇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싶습니다. 아버지, 그렇게 아십시오. 고맙습니다. (눈물)

문_ 아버님이 언제 많이 보고 싶고 그리우신지?
답_ 비가 올 적에, 비가 오는 날에는 지금도 그래. 어느 골짜기에서 우리 아버지가 썩어서 까마귀밥이 됐을까. 내가 제일 괴로울 때가 비가 올 때야. 어제도 밤늦게 비가 왔는데 내가 그 얘기를 또 했어. 60여 년 전에 아버지가 그렇게 돼서, 그 때 돌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수백 구의 시체를 막대기로 뒤진 거야. 아버지 찾으려고. 그게 한시도 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아. 지금까지도. 시체가 더럽고 무섭고 그런 게 없는 거야. 그 때는 오직 아버지를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뒤졌기 때문에. 내가 제일 괴로운 건 그 때야. 자식으로서. 비오는 날이 제일 괴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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