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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구자옥 (증언자-황규필,황성기)
이름: 관리자
2013-10-02 12:24:36  |  조회: 3815
첨부 : 71.081017A 구자옥.hwp  
2008. 10. 17 채록
081017A 구 자 옥 (具滋玉)

피랍인
생년월일: 1890년 3월 30일생
출생지: 서울
당시 주소: 서울 회현동
피랍일: 1950년 7월 중순이나 하순경
피랍장소: 서울시 종로구 누화동
직업: 경기도지사
학력/경력: 감리교 신학교, Springfield College(미국 메사추세츠주 소재)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1남 3녀
외모/성격: 작은 체구에 곧은 성격

증언자
성명: 1.황규필(1930년생) 2.황성기(1935년생)
관계: 1.외손자 2.외손자며느리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 전쟁 당시 경기도지사를 지낸 피랍인은 전쟁 발발 직후 피난을 가지 못하고 종로구 누화동 큰딸 집으로 피신해 있던 중 찾아온 무장한 정치보위부원 의해 연행되어 납북됨.
- 트럭에 실려 가다가 폭격을 피해 걸어서 납북되어 가던 중에 평소에 상태가 좋지 않았던 발의 병증이 악화되어 도중에 사망해 함께 있던 이들이 매장했다는 내용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인 명예 회복

“경기도 도청이 중앙청 바로 앞에 있었거든요, 서울을 절대로 사수한다고 서울을 빠져나가면 안 된다는 지시를 받으셨고 또 도지사로 계시면서 경기도 도청에서도 절대로 사수해야 된다고 그렇게 명령을 내리셔서 있었어요. 제가 저희 외조부께서 얘기하시는 걸 들은 거예요. 그 몇 시간 후에 외조부께서 걸어서 중앙청에 가서 보니까 벌써 다 빈집이 됐더래요. 다 도망갔대. 그래서 이건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집에 와서는 그냥 짐만 약간 꾸려서 한강으로 나갔는데 거기서 저지당해서 못 넘어가신 거예요.”

“갑자기 우리 누화동 집 대문을 막 그냥 발로 차고 흔들면서 열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나가서 대문을 열었는데 열자마자 한 예닐곱 명 되는 정치보위부 사람들이 권총을 차고서는 우르르 들어와서 구자옥씨 나오라고, 그러니까 외조부께서 건넌방에 계셨는데 나오시더라고요. 내가 구자옥이라고. 그리고는 지프차로 데려가서 앉혀서는 그렇게 가버리더라고요.”

○ 전쟁 당시 상황

<6.25전쟁이 나기 1, 2년 전부터 평양에서 여학생들은 가사시간에 간호 훈련을 받고, 남학생들은 전쟁 훈련을 받으며 전쟁을 준비함. 함흥시 영광읍에 위치한 영광 중학교에 남한 민간인들이 잡혀와 있다는 얘기를 피난 중에 장터에서 사람들을 통해 들은바 있음.>

문_ 고향이 평양이세요?
답_ (황성기)
네, 6.25 당시에는 평양에 있을 때 여학교 학생이었어요.

문_ 아버님은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답_ (황성기)
그 때 저희 아버님이 의사셨어요 .근데 빨갱이들 생각에는 의사는 부르주아 계통이니까, 아버님이 감옥에도 몇 번 가시고 그랬죠.

문_ 전쟁 당시 상황은?
답_ (황성기)
6.25전쟁이 났을 때, 이남에서 쳐들어왔다고 하면서 여학교에 그냥 빨갱이들이 있잖아요. 걔네들이 자기들도 전쟁터로 간호원 하러 간다고 막 그냥 그러고 있었어요. 제가 지금 기억하기에는 (전쟁 발발) 한 1년 전인가 그 때부터 여학교에서는 가사시간에 가사를 가르치지 않고 전쟁이 나서 사람이 다치면 어떻게 응급처리 하는 지, 붕대를 어떻게 감는 지, 그런 것들을 가르쳤거든요. 6.25전쟁 나기 1년 전인가 2년 전인가, 그건 기억이 없는데, 아무튼 가사시간에는 가사를 가르치지 않고 붕대를 어떻게 감고 그런, 지금 생각하면 간호원 훈련을, 남학생들은 전쟁에 나가서 총 쏘고, 그런 것들을 가르쳤어요. 그러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6.25전쟁을 하려고 준비를 그때부터 한 거에요.

문_ 피난을 가셨나요?
답_ (황성기)
저는 6.25가 나고 피난을 시골로 갔어요. 근데 가기는 영광읍에서 조금 떨어진데서 살았어요. 거기는 장터가 일주일에 한 번이었던 것 같아요. 일주일에 한번 열리면 장터 가는 길에 영광 중학교가 있었어요. 6.25때니까 여름방학이었겠죠. 거기 지나가면 학생들은 물론 한명도 없고, 교정에도 뭐 한사람도 없고, 그런데 사람들 말로 교실에는 이남에서 잡혀온 사람들이 있다고 그러더라구요. 저는 그저 그렇게만 알고 있었어요.


○ 직업 및 활동 (이하 내용은 모두 피랍인의 외손자 황규필의 증언)

<감리교 신학교를 나와서 YMCA를 통해 미국 유학, 귀국 후 YMCA 총무직을 계속 맡고 있다가 전쟁 당시에는 경기도지사를 지냄.>

문_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고 계셨는지?
답_ 경기도지사를 하고 계셨어요. 제가 알기로 8.15가 되고 미군이 들어와서 군정을 시작할 때 미국인을 데려다 경기도지사를 시켰어요. 그러다가 한국인에게 이양을 했는데 당시 도지사를 하던 미국인이 저희 외조부의 친구 분이셨어요. 그래서 그 분이 도지사로 계실 때 저희 외조부께서 통역을 맡아서 하셨대요. 군정이 끝나고 한국인에게 이양할 때 그 분이 경기도지사로 저희 외조부를 추천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경기도지사직을 맡게 되셨어요.


문_ 전쟁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답_ 여기서 감리교 신학교를 나오셔서 취직을 하셨어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시다가 기독교 청년회관, YMCA에 들어가셔서 훈련을 받으시고 일도 하시다가 외조부님을 괜찮게 보고 키워야겠다고 생각을 했는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알기로는 기독교 청년회 YMCA 주최로 하는 Springfield College라고 메사추세츠주에 있는, 거기가 대학인 동시에 YMCA 기간위원을 양성하는 곳으로 알고 있거든요. 거기를 마치고 돌아오셔서 YMCA 총무로 오랫동안 계셨어요.

문_ 정치활동도 하셨나요?
답_ 일제 강점기에 YMCA 총무를 하는 동안 많은 박해를 받으셨어요. 예를 들면 중국에서 혁명 운동하던 분들이 한국에 침투해 들어오면 먹을 것과 재정적인 부분들을 저희 외조부께서 대주셨다고 들었어요. 저는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린 시절 소학교 다닐 때는 외갓집에서 쭉 자랐어요. 그래서 외조부님이 일본 형사들에게 조사를 받으러 다니시는걸 보며 자랐는데, 일본 경찰들이 보기에 저희 외조부님이 중국에 있는 혁명투사들을 도와주고 하니까 가끔 와서 조사한다고 불러다 물어보기도 하고 여러 박해가 있었어요. 그러다가 서대문경찰서에 불려가서 고문을 당하시고 고초를 겪으셨죠. 중국에서 혁명 운동하는 사람과의 관계, 또 구라파나 미국에서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와 있는 유학생들과 함께 구미유학생회를 창설하셔서 YMCA 강당이나 사무실을 이용해서 친목단체 성격의 정기모임을 갖곤 하셨는데 서대문 경찰서의 일본인들은 그게 혁명운동의 기초가 된다고 해서 그것을 감시하고 그런 죄목으로 재판을 해서 몇 년 징역살이를 하셨죠.

문_ 그 때가 1930년대인가요?
답_ 1930년 후반기쯤 될 거에요. 그래서 일본 형사들이 와서 잡혀 가시는 것도 봤고, 그리고 몇 년 후 풀려나신 후에 돌아오셔서는 기운이 없으신지 이렇게 누우셔서 고민하시는 것도 보고 그랬어요.



○ 납북 경위

<전쟁 발발하고 경기도지사 차량으로 남하를 시도했으나 헌병에 의해 제지를 당해 피난을 가지 못하고 본가로 돌아감. 집은 이미 이웃들에 의해 살림살이를 빼앗기고 거처가 힘든 상황이라 이를 피해 누화동 큰딸집으로 가족들과 함께 피신을 했으나, 7월 중하순경 집으로 들이닥친 무장한 정치보위부 관계자들에 의해 연행됨. 피랍인의 장남도 함께 연행되었으나 정치보위부에 협조, 정보 제공자로 이용하기 위해 풀려났으나 가족과 함께 피난을 떠남.>

문_ 전쟁 발발하고 바로 피난을 못 가셨어요?
답_ 당시 회현동에 살고 계셨는데 피난을 가시려고 경기도지사 차가 와서 거기에 아이들을 싣고 한강까지 나갔는데 한강에서 헌병이 “아, 경기도지사를 하는 이런 분이 가시면 안됩니다.” 그러면서 그 헌병이 돌아가시라고 자꾸 그래서 할 수 없이, 막고는 안 보내니까, 그래서 한강까지 갔다가 돌아오신 거예요.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돌아오니까 벌써 세상이 바뀌고, 회현동 그 쪽에서는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경기도지사하는 구자옥씨네가 어딘지 다 알아요. 그래서 벌써 집으로 들어와서는 다 가져가는 거야. 옷도 가져가고 전부, 집은 벌써 그냥 박살이 났어요. 그러니까 거기서 살 수도 없고, 그래서 그 식구가 우리가 살던 누화동으로 온 거에요. 식구가 다해서 아마 10명도 넘었을 거에요. 그렇게 우리집에 와서 살고 계시다가 납치당하신거죠.

문_ 전쟁 발발하고 정부의 지시나 조치가 없었나요?
답_ 제가 듣기로는 그 경기도 도청이 중앙청 바로 앞에 있었거든요, 그 빨간 벽돌집이. 근데 서울을 절대로 사수한다고 서울을 빠져나가면 안 된다는 지시를 받으셨고 또 도지사로 계시면서 경기도 도청에서도 절대로 사수해야 된다고 그렇게 명령을 내리셔서 있었는데, 이건 제가 저희 외조부께서 얘기하시는 걸 들은 거예요. 그 몇 시간 후에 외조부께서 걸어서 중앙청에 가서 보니까 벌써 다 빈집이 됐더래요. 다 도망갔대. 그래서 이건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집에 와서는 그냥 짐만 약간 꾸려서 한강으로 나갔는데 거기서 저지당해서 못 넘어가신 거예요.

문_ 납치되신 건 언제인가요?
답_ 확실한 날짜는 모르겠는데 저희 집으로 오셔서 한 2, 3주 정도 계셨어요. 그렇게 계시다가 갑자기 낮에 정치보위부에서 사람들이 지프차로 두 댄가 석대가 와서 납치해 간 거예요. 그러니까 알고 왔죠. 그게 7월일 거예요. 7월 중순이나 하순쯤.

문_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답_ 그러니까 정치보위부에서 우리 누화동 집으로 낮에 찾아와서 그냥, 내가 그때 집에 있었거든요. 난 그때 대학생이고 연대 다니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리 누화동 집 대문을 막 그냥 발로 차고 흔들면서 열라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나가서 대문을 열었는데 열자마자 한 예닐곱 명 되는 정치보위부 사람들이 권총을 차고서는 우르르 들어와서 구자옥씨 나오라고, 그러니까 외조부께서 건넌방에 계셨는데 나오시더라고요. 내가 구자옥이라고. 그리고는 지프차로 데려가서 앉혀서는 그렇게 가버리더라고요.

문_ 납치 과정에서 폭력은 없었나요?
답_ 폭력 같은 건 없었고, 걔네들이야 다 권총 차고 그러고 왔으니까, 그냥 그대로 데리고 간 거야.

문_ 외삼촌도 함께 끌려가셨나요?
답_ 네, 외삼촌도 데리고 갔어요. 나보고도 “넌 뭐냐.” “난 외손자다.” 그랬는데 아들만 데리고 갔어요. 그리고 그 외삼촌은 한 일주일쯤 후에 “나가서 너는 구자옥씨의 아들로서 여러 정치 인사들을 많이 알 테니까 다니면서 그 정보를 알아가지고 우리 정치보위부에 주면 우리가 너를 귀히 대우해 줄 테니...” 그렇게 나가서 활동하라고 외삼촌은 내보냈대요. 그렇게 나와서 우리 집에 오셔서는 아이들을 데리고서 피난을 가야 되겠다고 하시며 가셨어요.

문_ 외삼촌과 외조부님이 함께 수감되어 계셨나요?
답_ 부자간에 그 안에서 만나서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고, 다 다른 방에다가 넣고선 이북으로 외조부를 데리고 갔다는 것도 외삼촌은 모른 채 그냥 나가서 자기네들과 협조하고 활동하도록 정치보위부에 들락날락하면서 보고하라는 얘기만 하고서 내보낸 모양이더라고요.



○ 납치이유

<고위공무원>

문_ 외삼촌은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답_ 외삼촌은 교통부에서 일하고 계셨는데 교통부의 과장인가 국장인가를, 공무원이셨어요.

문_ 외삼촌은 도지사의 아들이기 때문에 끌려가신 건지?
답_ 그렇죠. 당시 교통부 직책하고 큰 관계는 없었을 거예요. 정치보위부에서는 외삼촌이 구자옥씨 아들이니까 모든 정치계 인사들을 많이 알고 있다고 보고 그걸 이용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 납치 후 소식

<전쟁 이전부터 발이 불편한 상태였던 피랍인은 북으로 끌려가면서도 발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고, 끌려가던 중에 돌아가시게 되어 함께 가던 이들이 도중에 매장했다는 소식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됨. 그외 다른 소식은 없음.>

문_ 들려오는 소식이라도 없었는지?
답_ 한참 후에 들은 얘기로는 끌려가실 때 트럭에 타고 끌려가셨는데, 나중에는 공중에서 비행기 폭격에 맞을 수도 있고 그래서 산속으로 데리고 가서 걸어서 갔다고 해요. (외조부님이) 원래 발이 좋지 않으셨어요. 6.25 전에도 발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그렇게 강행군을 하다보니까 걸으실 수가 없으셔서 많은 고생을 하셨다는 얘길 들었어요. 이제 지치고 지치셔서 나중에는 돌아가셨고, 같이 끌려가던 사람들이 거기다가 매장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문_ 그 소식은 어디서 확인하셨어요?
답_ 신문에 났어요. 그런 소식이 신문에 난 것을 제가 봤어요.

문_ 이후 소식은 없었어요?
답_ 6.25 나고 나서는 나도 그때 나이가 20살이라 군대 안갈 도리도 없고, 대한민국 공군에 입대해서 근무했어요. 제대를 하고 나서는 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갔어요. 그러니까 저는 여기 살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긴밀한 정보는 없죠.

문_ 외조모님께서 내무서로 찾아가보시기도 하셨어요?
답_ 네, 그런데 우리가 신문에서 본 거 이외에는 별로 들은 게 없어요.



○ 남은 가족의 생활은?

<피랍인이 납치된 후 피랍인의 부인은 우울증에 시달리며 힘든 시간을 보냄.>

답_ 저희 외할머니는 우울증에 시달리셨어요. 외할아버님 납치당하시고 나서부터 제가 보기에는 이전 같지 않으시고 얘기도 별로 안하시고, 우울증으로 힘들어하셨던 것 같아요.

문_ 재산 피해는 없었는지?
답_ 그 회현동 집은 일본 사람이 살던 집이었어요. 그래서 그게 적산이 되어가지고 저희 외조부께서 거기 사셨지만, 거기 거주하시면서 수속을 하기 전에 6.25가 났어요. 그러니까 완전히 외조부님의 재산으로 되기 전에 그렇게 돼서 그걸 찾을 근거는 없죠. 그게 아직 사유재산이 되기 전의 일이니까 국가에서 처리를 했겠죠.

문_ 다른 가족들은?
답_ 어느 정도의 어려움은 있었겠지만 외삼촌이 계속 일을 하셨으니까 먹고 사는 데 아주 힘들고 그런 경우는 아니었어요.



○ 정부의 노력

<없음>

문_ 신고는 하셨나요?
답_ 나는 직손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하진 않고), 외삼촌이나 우리 사촌이 신고를 했을 거에요.

문_ 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답_ 제가 알기로는 뭐 별 거 없었던 것 같은데.



○ 호적정리

<모름>

답_ 모르겠어요.



○ 연좌제 피해

<없음>



○ 정부에 바라는 말

<피랍인 명예 회복>

답_ 지금 뭐 아무것도 안 되어 있으니까 정부에서 명예회복이라도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또 한국정부가 그런 분들을 경제적으로라도 도와주는 시스템이 되어있으면 좋겠어요. 제가 보니까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납북자 관계는 진전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도리어 뒤로 물러났다는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그들이 추구하는 이북과의 공존 화해, 뭐 이런 정책으로 나가고 있는 한 납북자들은 계속 희생자로 남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그런 비관적인 생각이 많아요.

문_ 납북 가족으로서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답_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이 없어요. 저는 미국에 살아도 한국에 늘 관심을 많이 갖고 한국 신문도 매일 보고 있는데, 한국 정부에서도 납치 인사들한테 무슨 관심이나 있는지 의심이 되고 한심할 때가 많아요. 그런 점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어떻게 좀 변화가 있어서 납북되신 분들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답_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저를 키워주셔서 오늘날 제가 이렇게 잘 장성해서 살고 있습니다. 6.25 때 납치당하셔서 뵙질 못하고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제가 하루도 할아버지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눈물) 아무쪼록 천국에서 이루지 못하셨던 이 세상의 일들 다 이루시고 편안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저희들은 그래도 이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렸을 때 몸이 약하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몸도 많이 좋아지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나마 편안히 그리고 아주 장수하시는 생애를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문_ 언제 외조부님이 많이 그립고 생각 나셨어요?
답_ 어렸을 때 그렇게 나를 데리고 다니시고 하셨기 때문에 생각이야 늘 나죠. 늘 나고, 제가 또 아이들을 길러보니깐 (할아버지께서) 나에게 참 잘 해주셨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 피랍인 구자옥의 약력

191?년 감리교 신학교 졸업
1917년 기독교청년회(YMCA) 간사
1921년 Springfield College 수학(미국 메사추세츠주 소재)
1924년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
1946년 초대 경기도지사
1950년 경기도지사 재임 중 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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