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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채록

납북자-김희련 (증언자-김종현)
이름: 관리자
2013-10-02 12:20:19  |  조회: 2726
첨부 : 68.080724A 김희련.rtf  
2008. 7. 24. 채록
080724A 김 희 련(金喜連)

피랍인
생년월일: 1935년 4월 5일생
출생지: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3가 48
당시 주소: 인천시 송현동 14번지
피랍일: 1950년 9.28수복 전날
피랍장소: 서울적십자병원
직업: 학생
학력/경력: 서울적십자간호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
직계/부양가족: 부모님, 2남매
외모/성격: 작은 키에 동글납작한 얼굴형, 침착하고 차분한 성격

증언자
성명: 김종현(1937년생)
관계: 남동생
증언성격: 간접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 적십자간호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피랍인은 부상병을 간호하는데 차출되어 적십자병원에서 일하다 9.28수복 하루 전날 병원의 모든 직원과 함께 북으로 끌려 감.
- 당시 64세였던 피랍인의 아버지도 시의원을 지낸 지역 유지로 피신 중에 밀고를 당해 내무서로 끌려가 심한 고초를 겪고 풀려났지만 그 후유증으로 2년 뒤 사망함.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인 생사확인, 납북 문제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인식하고 하루 속히 해결을 위해 노력할 것

“인민군 두 놈이 보초를 서고 있어서 이름을 댔더니 전화를 하더라구요. 그러더니 (누님이 병원 안에) 있다는 거야. 우리 누난데 좀 만나게 해달라고, 인천 집에 가야 되는데 누님이랑 같이 가려고 한다고 했더니 면회가 안 된다는 거야. 집에 가야 하는데 그럼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너 혼자 가라는 거야. 부모한테 가서 누나 여기 잘 있다고 전하라는 거야. 부모가 소식 듣고 오면 또 자기가 전해주겠다고 그래. 면회를 안 시켜주니 어떻게 해요. 볼 수가 없잖아요.”

“인민군들이 와서 풍비박산 나고 직원들은 다 끌고 갔다는 거야. 우리 누이는 학생이라고 했더니 그때 있던 학생간호원이 하나도 없다는 거야. 9.28수복 하루 전날 인민군이 전부 끌고 갔다는 거야. 직원들뿐만 아니라 학생들까지도 모두. 다 끌려갔다니까 혼자 눈물 흘리며 돌아왔지.”

“국가가 뭐예요. 국민이 있어야 국가가 존재하는 거거든요. 국민이 어디가 아픈지 얼마나 어려운지 이런 걸 헤아려줘야 해요. 국가가 해주는 일이 없으면 국민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사라지기 마련이에요. 너무나 억울하게 헤어진 가족들, 저놈들이 계획된 의도에 의해서 고의로 끌고 간 거야. 이걸 누가 책임을 져야 해.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국가가 막지 못하고 전쟁이 일어난 건데, 그것의 책임으로 보상은 바라지 않아요.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까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것만 알았으면 좋겠어. 그건 해줄 수 있잖아요. 나는 나이가 일흔 둘인데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몰라요. 내가 여태껏 참아온 것에 대한 보람이 있었으면...”










○ 직업 및 활동

<서울적십자간호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

문_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답_ 서울적십자병원 안에 위치한 서울적십자간호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어요.

문_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셨어요?
답_ 저희 아버님이 동장, 옛날에는 동회장이라고 했죠. 요샌 유급이지만 그때는 무급이었어요. 명예직이었거든요. 인천 송현 3동의 동회장으로 계셨어요. 시의회 의원으로도 계시고.



○ 납북 경위

<적십자간호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피랍인은 인민군 부상병 간호를 위해 적십자병원에 감금되어 일하다 9.28수복 전날 모든 병원 직원과 함께 북으로 끌려감. 피랍인의 아버지도 시의원을 지낸 지역 유지로 피신 중에 밀고를 당해 내무서로 끌려가 심한 고초를 겪고 풀려남.>

문_ 전쟁 당시 상황은?
답_ 저는 서울대사범부속중학교 1학년을 다녔고, 누이는 적십자간호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부모님은 인천에서 한강다리 끊어진 줄도 모르시고 남매가 다 서울에 있었으니까 우리 오기를 기다리셨죠. 갑자기 인민군이 들이닥쳐서 거기서 인민군에 잡혀 고초를 겪으시느라 도망도 못가셨대요.

아버님이 인천서 동회장을 보시고 시의회 의원으로 활동하신 거 이외에 반공청년단 단장을 하셨어요. 그때 사진이 지금도 있거든요. 그래서 고초를 당하셨나봐요. 아버지는 거의 인사불성이 돼서 풀어준 것도 아니고 죽이다 시피 했으니까 끌고 갈 수도 없었겠지. 걔네 상황으로 봐서 곧 인천상륙작전이 있었으니까, 끌고 갈 겨를이 없었지. 또 환자잖아. 나중에 늑막염으로 돌아가셨는데, 아버지가 걸어가실 수 있었다면 끌고 갔을지도 모르지. 끌고 가봤자 쓸모도 없는, 예순 다섯 살 먹은 늙은이를 뭐하겠어. 그래서 안 끌고 간 것 같아.

문_ 전쟁 중에 누님을 만나셨어요?
답_ 나는 서울 을지로 4가 주교동, 6촌 형님 집에서 하숙을 하다시피 하면서 학교를 다녔어요. 누님은 기숙사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면서 기숙사비하고 등록금만 내면 되니까 거기에 있었구요. 전쟁이 일어나서 누이는 인천에 갔겠지 생각하고 한강을 갔는데 다리가 끊어져서 못 내려가는 거예요. 인민군이 배를 못 타게 해요. 학생은 학생복밖에 입을 게 없잖아요. 학생인데 서울서 왜 인천을 가냐고 해서 우리집이 인천이라고 했더니 집이 인천이라는 증거가 없으니까 너희 엄마 아빠가 데리러 올 때까지 가 있으라는 거야. 어른은 왔다 갔다 할 수 있지만 (학생은) 안 된다 이거야. 그래서 못 건너갔어요. 그래서 6촌 형님한테 가서 얘기하니까 형님은 청년이라 위험하고 너는 학생이니까 돌아다녀도 괜찮을 거라고, 누이 학교에 가보라고 해서, 전쟁 나고 일주일쯤 뒤에 누님 학교로 찾아 갔어요.

인민군 두 놈이 보초를 서고 있어서 이름을 댔더니 전화를 하더라구요. 그러더니 (누님이 병원 안에) 있다는 거야. 우리 누난데 좀 만나게 해달라고, 인천 집에 가야 되는데 누님이랑 같이 가려고 한다고 했더니 면회가 안 된다는 거야. 집에 가야 하는데 그럼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너 혼자 가라는 거야. 부모한테 가서 누나 여기 잘 있다고 전하라는 거야. 부모가 소식 듣고 오면 또 자기가 전해주겠다고 그래. 면회를 안 시켜주니 어떻게 해요. 볼 수가 없잖아요. 그땐 돌리는 전화기였는데 전화로 통화 좀 하게 해달라고 하니까 그것도 바빠서 안 된다는 거야. 그래서 전화통화도 못하고 얼굴도 못보고 면회도 못하고 그래서 할 수 없이 혼자 인천으로 내려간 거죠.

문_ 인민군이 적십자 병원 출입을 감시하고 있었군요?
답_ 아마 민간인은 출입을 안 시킨 것 같애. 군인만 있더라고. 현관에 사람 하나가 있는데 가운 입은 걸 보니까 의사나 병원직원이겠지. 뭐 인민군이 있고 사람이 다니지도 않았으니까 삭막했지. 나야 뭐 누이 볼 욕심에 간 거고 갈 이유가 없지. 그때 아파도 뭐 병원에 갈 수 있었겠어.

문_ 누님은 어떻게 납북되었는지?
답_ 그리고 다시 어렵게 갔는데 헌병이 하나 서있고, 입구에 아저씨가 있어 먼저 헌병한테 물어봤더니 자기는 군인이라 민간인은 모른대. 그래서 아저씨한테 물어봤더니 이름을 대니까 자기는 목수 일을 봤던 사람이라 잘 모르고, 인민군들이 와서 풍비박산 나고 직원들은 다 끌고 갔다는 거야. 우리 누이는 학생이라고 했더니 그때 있던 학생간호원이 하나도 없다는 거야. 9.28수복 하루 전날 인민군이 전부 끌고 갔다는 거야. 직원들뿐만 아니라 학생들까지도 모두 다 끌려갔다니까 혼자 눈물 흘리며 돌아왔지.



○ 납치이유

<서울적십자간호고등학교으로 인민군 부상병 간호를 위해 차출됨.>



○ 납치 후 소식

<이후 조선일보에 실린 관련 기사를 통해 간호고등학교 학생들이 병원 직원들과 함께 부상병들을 데리고 원주를 통해 갔다는 소식을 접함. 휴전 이후를 기대했지만 이후 소식을 알 수 없음.>

문_ 들려오는 소식이라도 없었는지?
답_ 그 당시에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들은 얘기로는 그 간호사들과 학생들이 부상병들을 데리고 원주로 갔는데 쌕쌕이(전투기) 폭격이 있어서 못 움직이는 환자만 놔두고 피신을 하라고 했다는 거야. 그때 화물차로 싣고 갔다는데 그 화물차 바깥으로 전부다 피신을 해서 거기서 되돌아오지 않은 것은 죽은 것이고, 되돌아오면 산 것이라고 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당시 경비원이 그러더라고. 인민군들의 부상병 때문에 간호원이 만 명이라도 부족하니까 주사만 놓을 줄 알면 다 끌고 갔을 거라고.

문_ 찾으려는 노력은?
답_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6.25가 일어나고, 3학년 때 아버지는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어머니가 병간호하시느라 힘드셨고, 누이를 만날 수 없는 상황이니까 휴전되면 돌아올까 했는데 다 소용이 없더라구요.



○ 남은 가족의 생활은?

<피랍인의 부친도 전쟁 중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피랍인의 모친도 속병으로 고생함. 동생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함.>

답_ 아, 어려웠죠. 말도 못했죠. 그래서 고등학교밖에 못나왔어요.

문_ 어머니는 어떠셨어요?
답_ 어머님은 그런 이유로 속병이 생기셔서 그때 소화제가 소다가루나 소금을 드셨지. 지금은 그걸로 양념이나 하지만 그때는 소화제였어. 혹시나 딸이라도 살아올까 하고 내가 학교로 찾아가서 열흘, 어머니가 닷새, 그렇게 기다리다가 지금 돌아가신 지 16년 됐어.



○ 정부의 노력

<없음>

문_ 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답_ 도움이 아니라 박해를 한 거죠. 납북자 가족을 이상하게 보고 취업까지 방해하고 국가를 항상 원망하죠.



○ 호적정리

<미정리>

답_ 안했죠. 난 죽을 걸로 보지 않고 살아오길 바라고 (안했어요).



○ 연좌제 피해

<정보부 형사가 집으로 찾아와 피랍인의 소식을 묻곤 했음. 김영삼 정부 이전까지 감시가 있었으며 신원조회에 걸려 취업에도 어려움을 겪음.>

답_ 대한민국이 원망스러운 게 옛날에는 이념대립으로 방첩주간이니 반공주간이니 많았어요. 무슨 주간이다 하면 형사가 찾아오는 거야. “혹시나 누님한테 편지라도 안 왔어?”, 누구냐고 물었더니 “나 여기 정보부 형산데, 누이 6.25때 없어졌지?” 그래서 난 곧이곧대로 그렇다고 했죠. “여태껏 못 찾았지?” 그래서 인민군이 데려갔다는데 어떻게 찾냐고 했죠. 보이지 않는 중에 날 감시하고 있는 거랑 같은 거지. 그때까지는 그런 생각 못했는데 나이를 먹으니까 알겠는 거야. 혹시나 우리 누이가 사상적으로 교육을 받고 간첩으로 내려와서 나랑 무슨 접촉을 하지 않나 감시를 하는 거 같아. 이건 잘못 된거지.

문_ 취업에 어려움은 없었는지?
답_ 이를 악물고 공부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 취업을 하려고 지원서를 냈어. 원서를 내면 지금이랑 달리 신원조회하라지, 호적 첨부하라지 뭐가 많아. 다 해다 주지. 근데 신원조회에 뭐가 안된다고 바로 말해주면 좋은데, 신원조회 의뢰만 내가 하지 결과는 뽑는 쪽으로 가는 거야. 현직 경찰을 하시던 이모부가 올라왔을 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책상을 치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안 된다 이거야. 공무원이나 국가기관에 취직할 생각 말라 이거야. 너는 기술자로 자격증을 따라고 하는 거야. 왜냐고 물었더니 이모부도 이야기해줄 수 없다는 거야. 내가 그 뒤에 이모부의 말을 듣고 운전면허를 따서 운전을 했어요. 그 뒷이야기를 하면, 우리가 중동 바람이 나서 사우디를 전에 많이 갔죠. 난 운전을 할 수 있으니까 자신만만하게 지원을 했어요. 현대도 가고 대우도 가고, 하지만 다 안 되는 거야. 그것도 안 되는 거야. 얼마나 억울해.

나중에 김영삼 정부 때 연좌제 폐지가 된 거지. 납북자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정부가 방치해서 고생시키고 국가에서 찾아주지도 못하면서 간첩이 되어 올 것을 걱정해 그 가족에게는 취업에 신원조회로 불이익을 주다니, 이걸 국가가 배상을 해줘도 엄청난 거야. 내가 지금 나이가 70살인데 그런 불이익을 당했다고.



○ 정부에 바라는 말

<피랍인 생사확인, 납북 문제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인식하고 하루 속히 해결을 위해 노력할 것>

답_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 해요. 6.25를 뼈아프게 겪은 우리들 이야기를 후손들이 명심하고, 우리 같은 이런 세대가 절대 있어서는 안 돼. 김일성, 김정일은 교수대에 처벌 해야 해요. 수많은 국민의 피와 살을 도려낸 이런 아픔을 준, 이건 사형죄보다 더 심한 거야. 우린 이걸 50년이 넘도록 겪고 있잖아. 역대 정권이 말로만 했지 우리 문제에 관심이 너무 없었고, 납북된 어부의 가족 이야기는 신문에라도 나는데 우리는 그보다 더 쓰라린 아픔이 있는데도 신문은 물론 어디 아는 사람이 없어. 이래선 안 됩니다. 국가가 뭐예요. 국민이 있어야 국가가 존재하는 거거든요. 국민이 어디가 아픈지 얼마나 어려운지 이런 걸 헤아려줘야 해요. 국가가 해주는 일이 없으면 국민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사라지기 마련이에요. 너무나 억울하게 헤어진 가족들, 저놈들이 계획된 의도에 의해서 고의로 끌고 간 거야. 이걸 누가 책임을 져야 해.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국가가 막지 못하고 전쟁이 일어난 건데, 그것의 책임으로 보상은 바라지 않아요.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까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것만 알았으면 좋겠어. 그건 해줄 수 있잖아요. 나는 나이가 일흔 둘인데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몰라요. 내가 여태껏 참아온 것에 대한 보람이 있었으면...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답_ (눈물) 누나, 나 종현이야. 누나 찾으러 인민군이 쳐들어온 지 며칠 만에 적십자병원에 갔더니 면회도 안 시켜주고 전화도 안 된대. 한강다리 끊겨서 광나루를 돌아 말죽거리로 해서 하루가 걸려서 인천에 갔어. 누나하고 나 기다리느라고 엄마 아빠는 피난도 못가고, 인천상륙작전 며칠 남기고 아버지가 숨어있던 광이 걸려서 아버지는 살점이 떨어질 정도로 매를 맞고 고문을 당했어. 그 후유증으로 그때 늑막염이 걸려서 2년 만에 돌아가셨어.

누나, 이미 지나간 일은 어떡하우. 그 놈들이 밉지만 난 누나가 살아만 있다면 용서해줄 수 있어. 나중에 수소문해보니까 원산쪽으로 끌려가다가 폭격 당했다는 얘기 듣고 울었어. 누나가 살아있으면, 살아있어야 돼. 내가 누나 찾을게. 통일이 빨리 됐으면 좋겠어. 북쪽에서 누이가 어떤 실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난 다 용서할 거야. 부디 만날 때까지 누이 건강하게 몸조심하고 이 동생 기다려야 돼, (눈물) 알았지? 누나가 나 얼마나 사랑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 난 누이한테 사랑을 베풀 기회가 없었잖아. 누이를 만나면 내가 천 배 백만 배 내 누이한테 사랑 베풀게. 누나 사랑해요.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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