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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박현명(증언자-박승증)
이름: 관리자
2016-12-13 11:21:26  |  조회: 1697


피랍인

생년월일: 1902년 7월 8일(음력)

출생지: 함경남도 북청군 하거서면 임자동, 박촌

당시 주소: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5번지

피랍일: 1950년 8월 23일

피랍장소: 자택

직업: 성결교회 총회장, 성서학원 신학교 교수, 한국기독교연합회 회장

학력/경력: 성서학원/성결교회 총회장, 성서학원 신학교 교수, 한국기독교연합회 회장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2남 2녀)

외모/성격: 체구가 크고 미남자, 성격이 엄하였음.

  

 

증언자

성명: 박승증(1930년생)

관계: 장남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피랍인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기독교계에서 지도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피랍 당시에는 성결교회 총회장을 하였음.

- 전쟁 중에 피신해 있었지만, 북한 당국이 각 교회 예배당의 예배를 허락하는 모습을 보고 자택으로 돌아왔다가 연행되어 감.


직업 및 활동

〈피랍인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기독교계에서 지도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피랍 당시에는 성결교회 총회장을 하였음>

문_ 아버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답_ 신학교 교수와 성결교회 총회장을 하셨어요. 또 기독교민주동맹에는 가담을 안했고 해방 후에 한국기독교연합회, 한국기독교연합회, 지금 NCC라고 그러죠. 해방 후에 재건할 때 기독교연합회 회장을 하셨죠.

문_ 다른 사회 활동은 안하셨나요?

답_ 그런 데에는 별로 관여를 안 하셨어요.


납북 경위

〈종교 활동의 자유를 보장해준다는 북한의 공작에 속아 회의에 참석하였다가 결국 피랍을 당함>

_ 6·25 당시 상황은 기억나세요?

답_ 6·25 당시에는 내가 서울에 없었고, 동생들한테서 들은 이야기죠. 당시에 인민군이 들어와서 당분간은 집에 그대로 살았어요. 자택이지만 신학교 사택이거든. 살다가 어느 날 별안간 나가라고 해서 쫓겨난 거지. 쫓겨나서 친척집 여기저기 옮겨 살았지. 결국 그때는 무서운 시대니까 밖에 사람이 아무리 친척이라도 오래 와 있는 게 부담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서울에서 전전한 거지. 도강을 못 했으니까.

문_ 납북 당시 상황은 어땠나요?

답_ 북한이 점령한 후 정보 계통에 있는 사람들이 포섭을 하는 거지. 그 결과 장로교, 감리교, 신학교를 다 개교 시켰어요. 문 닫았던 예배당도 다시 문 열고 예배 보라고 그러고. 그러니까 숨었던 목사들이 다시 나온 거야.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되니까 신학교 다시 열려고 사택으로 다시 돌아온 거지. 왔는데 데려간 거야. 그게 다 전략적으로 숨었던 사람 노출시켜서 다 잡아간 거지.

그러니까, 당시에 북한이 만든 기독교도연맹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어요. 남한에 쳐들어 와서 이 기독교도연맹이라고 하는 것이 회의를 하니까 목사님들 참석하시라고 자동차로 모시러 온 거에요. 그리고 일망타진 한 거지요. 그러니까 아버님은 여름에 밀짚모자 쓰고 베옷 입고 고무신 신고 회의 좀 갔다 온다고 차타고 나가셨다가 그 다음에 못 온 거지.

당시에 집에 찾아와서 회의에 오시라고 하니까, 회의에 다녀온다 하시고는 나가셨죠. 그때는 이미 예배당도 다시 열고 예배 봐라, 신학교도 문 열고 다시 시작해라 이랬으니깐 ‘어, 이게 뭐가 되려는가보다.’ 하고 나갔다가 다같이 잡혀간 거예요.


납치 이유

〈월북자이자 북한 무산군 대의원 박철이라는 사람이 계획적으로 이남으로 돌아와서 남한의 목사들을 속여서 데려갔음〉

문_ 동생 분께서 처음 납북 당시 상황을 적으셨을 때, 북한 무산군 대의원 박철이라는 자가

배후에 있는 걸로 안다고 쓰셨거든요?

답_ 맞아. 당시에 서울역 앞에 성남교회라고 하는 교회에 송창근 목사님이 계셨어요. 당시의 아주 유명한 지도자 목사님이었는데 우리 아버지하고 가깝게 지내던 선배 장로교 목사님이었어요. 박철이라는 사람이 그 교회에 다녔어요. 이 사람이 이남에 있을 동안에 여러 차례 체포되었을 때 송창근 목사님이 항상 보증을 서서 빼내주고 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결국은 월북을 했어요. 월북을 하고 이 사람이 이남으로 내려온 거야. 북한의 상당한 사명을 가지고 내려 온 거지. 그래서 목사들을 속이고 조종하는 역할을 박철이가 한 거예요. 그러니까 박철이가 그 배후에 있었다는 게 맞지요.


납치 후 소식

〈안재홍씨의 장례식에 참석을 했다는 북한 방송을 통해 한때 나마 생사확인이 가능했음>

문_ 그 이후에 어디로 끌려가셨나요?

답_ 그것은 알 수 없는데요. 아까 말한 송창근 목사님이 같은 시절에 납치됐다가, 북한군이 철수하면서 철원 쪽으로 끌려가시다가 돌아가셨다고 하는 것은 확인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도 그 분이랑 같은 방향으로 같이 끌려가지 않았겠나 하고 추측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 후에 대해서는 자세한 이야기는 하나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없고.

그런데 일본에서 목회하실 때에 동경 교회에서 집사하시다가 장로 되신 노인이 있는데, 그 분이 방송을 들었대요. 북한방송을 들었는데 안재홍이라고 하는 납치된 남한의 정치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장례식을 열었고, 기독교 대표로 몇 사람이 그 자리에 참석을 했는데 글쎄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기 나오더라 하는 거예요.

그게 몇 년도였는지 확인을 못했지만, 일단 납치되고 북한에 간 다음에 몇 년을 살아 계신 거예요. 그러니까 그 안재홍씨가 돌아가신 연도를 찾으면 몇 년도인지 알 수 있겠지.

또 다른 소문이 있었는데, 납치된 목사들을 저 압록강 어디 인근에 집단 수용했었는데, 그 인근 마을에 있는 기독교인 부녀자들이 목사들한테 가끔 음식을 준비해서 대접을 하고 그랬는데, 그게 발각이 돼가지고 음식을 제공하던 기독교인들이 처단되고 목사들은 다른 데로 옮겨졌고,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고 하는 그런 소문이었죠.

문_ 아버님을 찾으려는 노력은 어떻게 하셨나요?

답_ 내 개인적으로 한 것은, 내가 제네바에 10년 있는 동안에, 내가 66년도에 제네바에 갔거든요. 제네바 사정을 좀 안 다음에. 말도 좀 통하고 그렇게 된 다음에. 국제적십자위원회에 간 일이 있었어요. 국제적십자위원회가 뭘 하고 있는지, 그것을 확인하려 한 번 갔었는데, 거기에 간 것까지 한국의 중앙정보부 사람은 위험하게 보더라고. 그러니까는 그 당시에 내가 받은 인상은 중앙정보부나 한국 외교쪽에서는 ‘국제적십자위원회 자체도 우리 편이 아니다. 그 사람들은 북한 쪽인 것 같다’ 하는 의심을 한 것 같아. 그래서 내가 규탄을 받은 일이 있어요. 거기를 왜 다니느냐? 중앙정보부에서 나온 사람 있잖아요. 대표부니 이런 데 가면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는데. 그러니까 국제적십자위원회도 아주 100% 남한 편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그것 출입하는 것도 이 사람은 신경을 쓰는구나. 그럼 결국은 다시 말하자면 납북자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지. 정부가. 난 그렇게 판단을 했지요.


남은 가족의 생활

〈남편의 납북 이후 홀로 생계를 이끌어가야 했던 미망인의 어려운 상황>

문_ 아버님 납북되신 다음부터 어머님이 혼자 생계를 책임지셨죠?

답_ 고생하셨죠. 아주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셨죠.

문_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답_ 내가 미국에 가 있을 동안에 부산에서는 처음에, 우리 아버지의 친구인 의사분이 부산역 앞에서 큰 병원을 하고 계셨는데, 병원에서 신세를 지고 있다가 이제 보수동에 하꼬방을 짓고 이래저래 생계를 꾸려갔어요. 내 동생은 학교 다니면서 미군 부대에서 아르바이트 하고. 누이동생도 마찬가지였고. 그렇게 먹고 산 거지.

서울에 오니까 신학교 사택들은 다 폭탄 맞아서 지붕 하나도 없이 깨지고 해서, 동숭동에서 산 밑에 무허가 주택을 하나 인수해가지고 그것 수리해서 이사 들어간 거지. 기와도 올리지 못하고 천막으로 지붕을 만들어서 살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 어머니가 하숙을 했어요. 서울대학교 바로 뒤니까, 하숙을 하면서 자식들을 먹여 살렸죠.

그런데 어머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셨대요. ‘내가 총회장 목사의 부인이 아니면 동대문 시장에 나가서 장사라도 할 수 있는데, 총회장 부인이 동대문 시장에서 어떻게 장사를 하나?’ 당시만 해도 또 그런 데에는 엄격했잖아요? 목사 부인은 굶어죽더라도 목사부인다워야지. 그리고 우리 어머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가 돌아오실 거라고 믿었어요. 돌아오시면 자식들하고 같이 안 산다고 혼자 살다 돌아가셨어.

 

호적 정리

〈정리함>

문_ 아버님 호적 정리는 하셨나요?

답_ 그건 우리 어머님이 가정재판소에서 아버지 돌아가신 걸로 그렇게 정리하셨더라고.


연좌제 피해

〈증언자는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지만, 10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신원조회 당시 불합리한 조치가 있었음>

문_ 혹시 연좌제 피해 같은 것도 있었나요?

답_ 연좌제야, 내가 저기 58년도에 귀국을 했습니다. 49년도에 갔다가. 귀국해가지고 신원조회를 떼려고 서대문구청에 갔는데, 호적에 빨간 줄이 있어서 신원조회서가 안 나오더라고. 그때까지도 납북된 사람을 납북자로 안 보고 월북자로 본 거야. 그게 언제 해제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신원조회가 안 돼서 알고 봤더니 호적에 빨간 줄이 있어.

문_ 공직에 진출하시려고 했다면 막히셨겠네요.

답_ 내가 그럴 일은 없었으니까.


정부에 바라는 말

〈지금까지의 정부와는 달리 앞으로 남북 관계에서 전쟁 납북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실질적 노력을 당부>

문_ 정부나 사회에 바라는 바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답_ 우리 정부는 납북자 송환 노력은커녕 오히려 남은 가족들을 감시하는 데에 더 신경 쓰는 것 같았죠. 시카고에 있는 누이동생은 ‘그까짓 것 신고하면 뭘 해, ‘이것 하면 살아온대?’하는 분위기야. ‘정부가 책임질 거야?’라는 생각보다는 그래도 정부가 관심을 가지고 이 문제를 북한에 언급이라도 했다, 그 정도만 해도 가족들은 옛날하고 달라진 것을 느끼잖아. 이 문제는 가시적으로 가족들이 ‘아, 정부가 뭘 하려는 거구나.’를 좀 알 수 있게끔 했으면 좋겠어. 나보고 얘기하라면 그 정도입니다.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지독한 가난이 싫어 의사가 되려 했지만 결국 아버지 뜻대로 기독교 역사 연구를 직업으로 삼게 된 아들의 마음>

문_ 지금이라도 아버님께 하고 싶었던 말씀이 있으시다면?

답_ 우리 아버지가 교회사 교수였어요. 저는 목사가 워낙 가난해 의사가 되려고 했지만 결국 교회사 연구가 내 전공 분야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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