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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신관영(증언자-신동운)
이름: 관리자
2016-12-13 12:21:46  |  조회: 1666


피랍인
생년월일: 1913년 1월 5일
출생지: 경기도 광주군 실천면 곤지암리
당시 주소: 중구 을지로 2가 65-6
피랍일: 1950년 7월 22일
피랍장소: 을지로 2가 자택
직업: 국회의장 신익희 비서
직계/부양가족: 부모, 배우자, 자녀 (6남매)


증언자
성명: 신동운 (1936년생)
관계: 아들
증언성격:


특이 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해공 신익희 국회의장 비서였던 납북자는 삼청동 본관에 있다가 할머니, 갓난아기 걱정으로 집으로 왔는데 한강다리까지 끊기자 피난을 포기하고 서울에 있다가 납북됨.
- 6·25 발발 후, 7월 초에 당시 정치보위부로 사용되던 국립중앙도서관 건물로 끌려가 3일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풀려났음.   
- 7월 22일, 안성 처갓집으로 피신하던 중에 잠깐 들렀던 시계방에서 두 명의 남자에게 끌려 나가 파출소 방면으로 사라진 것이 목격되었음.    
- 1963년에 일본으로 출국하려던 증언자가 당시 외사과 신원조회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연좌제 피해 경험이 있음.


“ 아버님이 국회의장 본관에 계시다가 집으로 나와서 할머니 걱정, 그 핏덩어리 아들 보고는 곤지암으로 피난 못 간 사이에 한강 다리는 끊어지고 그랬나 봐요. 그래서 서울에 계속 머물러 계셨죠.”
 
“7월 22일에 아버지는 곤지암으로는 피해 가지 못하고 처갓집(우리 외갓집이 경기도 안성이에요)에 가신다고 아침 일찍 나가셨대요. 그런데 우리 먼 친척 되는 사람이 시계방을 해요. 아버지가 거기에 들렀다가 거기에서 잡혀가요. 시계방 아줌마 말로는 자기가 쫓아가보니까 파고다 공원 옆에 파출소 있잖아요. 지금도 있어요. 그 파출소 옆으로 아버지를 데려갔다고 하더라고요. 거기에서 그 아줌마가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한테 ‘언니, 오빠가 잡혀갔어.’ 이러셨다는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는지 전혀 모르죠.
그 다음에 또 누님한테 들은 얘기는, 금붙이를 달라고 해서 지금 롯데백화점 자리 그 국립도서관에 찾아갔고, 그 다음에 서대문 형무소까지 가셨다고 해요. 거기서 그 간수라고 하나, 그 사람들이 금붙이 시계 이런 걸 요구하면 면회가 되고 했다는 것이고요.”


직업 및 활동

<피랍인은 당시 국회의원 해공 신익희 선생의 비서였고 다른 사회활동을 하지는 않았음>

문_ 아버님이 출생하신 곳이 어디죠?
답_ 경기도 광주군 실천면 곤지암리 입니다. 저희가 거기에서 4백 년 살아온 종갓집입니다. 정확히 407년입니다. 제가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의 15대 종손이 되고 아버지가 14대가 됩니다. 1592년부터 산거예요. 아버지가 독자, 할아버지가 독자, 우리가족이 6남매 되었지만은 바로 거기에서 납치당했습니다.

문_ 아버님 출신학교가 어딘지 기억나세요?
답_ 일제 때겠지요. 아버지가 외아들에 장남이고 종손인데, 학교에 보냈지만 장가도 일찍 보냈겠지요. 할아버지가 독자에다가 대종가 집에 아버지가 또 독자이니까 빨리 장가를 보낸 거죠. 아버님 생년월일이 1913년이라고 했는데 원래는 그게 실은 1913년이 아니에요. 원래는 1915년입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한 살이 더 많아서, 원래는 1915년생인데 1913년생으로 만든 겁니다. 이게 이번에 납북자 신고할 때 다 드러나더군요. 이것에 대해서 증명을 하라고 하대요. 아무튼 아버지는 삼대독자에다 제일 막내였어요. 할아버지 환갑날 처음 태어난 아들이, 전쟁 통에 납치가 된 거죠.

문_ 당시에 아버님 직업이 어떻게 되셨어요?
답_ 국회의장 해공 신익희 선생 비서요. 삼청동 본관에 계시다가 할머니, 갓난아기 때문에 사가로 나오셨는데 해공 선생, 이승만 박사는 수원으로 내려가고 한강다리는 끊기고 난리였죠. 

문_ 아버님이 비서일 말고 다른 활동도 하신 것이 있으세요?
답_ 없습니다. 그때 35살, 젊으셨어요.


납북 경위

<피랍인은 갓난아기인 막내아들과 부모님을 걱정하느라 6·25가 발발하고 나서도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머물러 있었음. 경기도 안성 처갓집에 가는 길에 친척이 운영하는 종로 시계방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납치되어 감> 

문_ 6·25 발발 당시 상황을 좀 말씀해주시겠어요?
답_ 을지로 2가 저희가 살던 집이 적산가옥입니다. 방이 많았어요. 외갓집 식구들도 많이 있고 했는데. 할머니가 병중이었고, 막내 동생이 두 달인가 100일인가였어요. 그러니까 아버님이 국회의장 본관에 계시다가 집으로 나와서 할머니 걱정, 그 핏덩어리 아들 보고는 곤지암으로 피난 못 간 사이에 한강 다리는 끊어지고 그랬나 봐요. 그래서 서울에 계속 머물러 계셨죠. 

문_ 납북되셨던 날짜를 기억하시나요?
답_ 정확하게 7월 22일이에요. 그때는 제가 시골 곤지암에 있어서 누님한테 들은 얘기입니다. 6·25가 났잖습니까. 시골에서 할아버지가 사람을 보냈어요. 당신 손자들, 그러니까 우리를 데려오라고요. 누님이 나보다 5살 많으니까 20살, 내가 15살. 제가 그 사람을 따라가느라 아버지, 어머니하고 헤어진 거죠.
7월 22일에 아버지는 곤지암으로는 피해 가지 못하고 처갓집(우리 외갓집이 경기도 안성이에요)에 가신다고 아침 일찍 나가셨대요. 그런데 우리 먼 친척 되는 사람이 시계방을 해요. 아버지가 거기에 들렀다가 거기에서 잡혀가요. 시계방 아줌마 말로는 자기가 쫓아가보니까 파고다 공원 옆에 파출소 있잖아요. 지금도 있어요. 그 파출소 옆으로 아버지를 데려갔다고 하더라고요. 거기에서 그 아줌마가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한테 ‘언니, 오빠가 잡혀갔어.’ 이러셨다는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는지 전혀 모르죠.
그 다음에 또 누님한테 들은 얘기는, 지금 롯데백화점 자리 그 국립도서관에 찾아갔고, 그 다음에 서대문 형무소까지 찾아가셨다고 해요. 거기에서 간수라는 사람들이 금붙이 시계 이런 것을 주면 면회가 된다고 했다는 것이고요.


문_ 누님은 지금 생존해 계세요?
답_ 아, 지금 서울에 생존해 계세요. 저보다 5살 많으니까, 지금 여든 세 살이시죠. 건강하세요.

문_ 네, 직접 목격하신 분은 그 시계방 아주머님이신 거고요?
답_ 그렇죠. 그 양반이 목격자죠. 자기 오빠가 찾아 들어왔는데, 두 놈이 따라 들어오더니, 그때 오라를 채우고 갔는지 끌고 갔는지 그건 모르죠. 두 사람이 따라 들어와서 저희 아버지를 데려가기에 쫓아 나가 보니까 파고다공원 파출소로 갔다는 것만 들은 거지 그 당시 구체적인 상황은 모르죠.

문_ 그 분은 혹시 지금 생존해 계세요?
답_ 돌아가셨죠.

문_ 네, 그 이후로 아버님을 찾으려는 노력을 어머님이 하셨나요?
답_ 그거는 아까 말씀드린 누님이 활동한 것 밖에, 어머니야 발만 구르셨겠지. 우리들은 시골에 있었고, 누님만 서울에서 어머니하고 계셨으니까요. 그 놈들이 금붙이를 요구해서 면회를 할 수 있었다는데 정확히는 몰라요.

문_ 당시에 납북자 신고를 하셨어요?
답_ 전쟁 끝난 다음에 대한적십자에 했죠. 적십자사 기록에도 나와 있습니다. 


납치 이유

<피랍인의 집 옆에는 동국대학교 좌익 학생들이 모여 살고 있었고, 피랍인이 사무를 처리하기도 했던 집 마당이 훤히 보였으므로, 그들의 밀고로 인하여 납치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 피랍인의 딸이 피랍인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였으나 뚜렷한 소식을 들은 바도 없었음>

문_ 납치당한 이유를 들으신 바가 있나요?
답_ 우리 집 앞에 2층 건물에 학생들이 많았는데, 동국대학 학생들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게 빨갱이 소굴이었어요. 앞집 2층 빨갱이 소굴에 동국대 학생들이 있었고, 우리 집은 마당도 크고 참 커서 잘 보입니다. 신익희 선생 국회의원 출마할 때 모든 사무를 우리 집에서 다 처리했어요. 그러면, 빨갱이들이 우리 집에서 뭐 하는지를 다 보고 있었다는 거예요.
6·25가 터졌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빨갱이들이 나와서는 우리 집에 들이닥쳤어요. 우리가 놀랐고 소리 지르고 그랬던 것은 내가 기억해요. 내가 거기에 있었으니까요. 그 다음에 아버지가 3일 동안 잡혀갑니다. 그런데 그게 누구한테 잡혀 갔는지를 몰라요. 하여튼 3일 동안 잡혀서 지금 롯데백화점 자리 당시 국립도서관에서 3일간 있다가 나오셨다는 겁니다.

문_ 그게 언제죠?
답_ 내가 서울에 있을 때가 6·25나고 바로죠. 6·25 일어나고 아마 7월초 되겠죠. 그 때 저는, 지금도 영락교회 옆에 중부경찰서가 있습니다만, 아버지를 중부 경찰서 앞에서 기다렸는데 만나 뵙지는 못했어요. 그것은 기억을 해요. 제가 6·25나고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 드릴 것은 그것 밖에 없어요.

문_ 3일 동안 끌려가셨을 때, 고문 당하셨다는 얘길 들으셨나요?
답_ 글쎄, 전혀 들은 기억이 없어요. 고문당했다고 해서 아버지가 아들한테 그런 얘기를 했을 리도 만무하고, 또 그놈들이 내보낼 때 여기서 있었던 일 말하면 죽인다고 그랬을 테고. 거기에 무슨 고문을 당했는지 그건 몰라요. 그러나 나중에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 얘기가, 우리가 빨갱이를 너무 모르니까 그렇지, 그 때 나오자마자 빨리 피신을 했어야 되는 거랍니다.
그네들이 볼 때는 국회의장 비서는, 가치가 있을 만한 거 아녜요? 이것은 나중에 이북서 나온 사람한테 들은 얘기인데, 그 때 피했어야 되는 거랍니다. 그래도 7월 22일이면 빨리 피한 편인데, 벌써 피하는 날 잡혔잖아요. 그런데 그게 여전히 의문이에요. 어떻게 알고 그랬을까.
누가 미행을 했던 것인지, 아버지는 왜 곤지암에 가지 않고 안성 처갓집에 갔는지, 왜 시계방에 먼저 들렀다가 잡혀갔는지. 그게 저로서는 의문입니다. 들은 얘기도 하나도 없고 도무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죠.


연좌제 피해

<1963년도, 증언자가 롯데에서 일하기 위해 일본에 입국하려고 했으나 신원조회에 걸려서 통과가 되지 않고 있었는데, 증언자 처가의 도움으로 간신히 입국한 바가 있음>  

문_ 연좌제 피해가 혹시 있으셨나요?
답_ 예. 제가 63년도에 롯데라면, 지금의 농심입니다. 그곳에서 일하기 위해 일본에 가려고 여권을 신청했는데 외사과에서 허가가 안 나요. 그 때 내 나이 스물일곱 됐어요. 62년도에 졸업하고 63년에 처음 일본에 가는 겁니다. 나로서는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 나이에, 그리고 어디 감히 일본을. 지금 일본 롯데 신격호, 그 분한테 가는 거예요. 그 셋째 동생, 지금 농심 사장한테 내가 발탁이 돼서 일본에 가려는데 신원조회에 딱 걸리는 거예요.

63년도에 일본 조총련들 그냥 이북으로 보내고 그랬던 시절인데 어떻게 내가 일본에 갑니까? 조총련 소굴이 있는 일본에. 외사과에서 그대로 스톱이 됐어요. 보통 피해를 당한 게 아니죠. 회사 측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생각을 해 보세요. 그러나 이건 할 얘기는 아니지만, 처갓집의 높은 사람이 지금의 정보부에 계셨을 거예요. 장가가기 전이지만은 처갓댁이 군대에서 꽤 높은 사람 댁이니까, 그래도 부탁을 한 것이죠. 지금 일본 롯데에 가려고 하는데 신원조회에 걸려서 좀 도와달라고 처가댁에 부탁해서 가까스로 가게 됩니다.
 
문_ 지금 말씀하신 신원조회 걸린 것 이외에 다른 불이익은 없었나요?
답_ 그때 한번 그렇게 됐으니까는, 그 다음에는 연좌제가 풀렸기 때문에 70년도에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된 거에요. 캐나다로 갈 때는 신원조회 같은 거 걸리지 않대요. 한번 갔다 왔으니까. 그리고 일본은 자주 갔다 왔으니까 따로 신원조회 할 일이 없죠. 캐나다 이민 수속 밟을 때 따로 신원조회를 하는데 걸리지 않았어요.
 
문_ 다른 가족 분들도 이런 피해 당한 적은 없으시고요?
답_ 없어요. 동생들은 따로 없어요.
 

남은 가족의 생활

<해공 신익희 선생이 사용하던 적산가옥에서 살았던 피랍인의 가족은 집에 세를 주면서 그 수익으로 생계를 꾸렸다. 아버님에 대한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채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아왔다>

문_ 아버지 납치되시고 이후 생활은 어떻게 하셨어요?
답_ 생활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곤지암에서는 대지주, 부잡니다. 쌀, 장작은 가져왔었을 테고. 가장이 갑자기 없어졌는데, 막내 갓난아기까지 있었으니까 어려운 생활이지요.
누님이 을지로 집 살림을 했죠. 아주 큰집이었습니다. 그게 일본 애들 경전 사장집이에요. 적산가옥이지. 그게 해공 신익희 선생이 중국에서 나와서 그 집에 있다가, 국회 의장되면서 관저에 들어가고, 우리가 그 집에 살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2층에 방이 3개, 밑에 사무실도 많았습니다. 방 하나 세주고 등록금 내고 하는 식으로 내가 대학까지 졸업을 하고 그랬지요.

문_ 처가댁에 국정원 관계자 분이 계시다고 하셔서 그 분 도움으로 해외도 나가셨잖아요? 혹시 그 분을 통해서 아버님 소식은 못 들으셨나요?
답_ 아휴, 못 듣죠. 그 때는 전혀 못 들었습니다.

문_ 혹시 탈북해서 나오신 분들 통해서도 못 들으셨나요?
답_ 전혀 그런 것은 없어요.
 
문_ 어머님도 많이 힘드셨을 것 같은데?
답_ 남편 잃고 제일 큰 아들 캐나다 이민 가버리고, 남은 동생들도 캐나다 가 버리고. 바로 아래 동생하고 누님만 한국에 남아 있는 거죠. 가장이 없어진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어마어마한 부자예요. 곤지암 일대 땅이 다 저희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지키지를 못하는 바람에 다 없어졌지요….
 
문_ 6.25 사변이 터졌을 때 가산을 잃게 되신 건가요?
답_ 해방 되자마자 이승만 박사가 토지 개혁 했잖아요? 토지 분배를 하니까, 소작인들한테 토지가 다 분배되고, 할아버지는 서울에 올라오셨죠.
물질적으로 따지면 어마어마한 부자였는데, 우리 엄마가 고생한 것은 말을 못하는 거죠. 종갓집에서 종부 하는 거죠. 비참한 겁니다. 부자가 굶어 죽는다는 게 뭔지 아세요? 우리 할아버지 돌아가실 적에 쌀이 없어서 돌아가신 것 같아요. 그게 1963년, 고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할아버지가 54년도에 돌아가시는데 대지주의 땅이 있지만은, 시어머니, 즉 할머니는 1.4 후퇴 때 돌아가시고 막내는 그대로 백일해가 돌았는지, 그냥 6.25 때 죽었고. 그 핏덩어리를 어디다 묻었는지도 모르는데 이 못난 놈은 글쎄 장남 노릇 못하고서 캐나다로 이민을 갔잖아요. 내 바로 아래 동생이 효잡니다. 어머니가 절에 간다, 무당집 간다, 그걸 다 뒷바라지 한 게 내 동생이에요.
 
문_ 동생 분은 계속 어머니하고 사셨으니까 아버님에 대해서도 얘기를 좀 들으셨겠네요?
답_ 그렇겠죠. 들은 얘기가 무당집 가는 거예요. 무당집 가면 무당은 ‘아버지 살아계시다.’ 이런 얘기나 하고 내 동생은 그 뒤치다꺼리 하는 거죠. 저는 한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일 가슴이 아픈 게 이사장님의 노력, ‘이만큼 이루기까지 많이 힘들었을 텐데 나는 도대체 뭘 했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내가 편지를 보낸 거예요.

문_ 혹시 아버님에 대해 기억나시는 것 있으세요?
답_ 제가 결혼생활 40년 하면서, 집사람이 묻는 것 중에 제일 대답 못 하는 게 그거예요. 아버지에 대해 말할 게 아무것도 없네. 공부 못한다고 야단맞은 거 이런 게 전혀 없으니까.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네. 한 가지, 을지로 1가 골목에서 친구들이랑 놀다가 아버지가 골목으로 들어오시는데 그걸 보고 앞에 있는 친구가 ‘야, 너희 아버지 온다.’ 하면 뛰어 들어갔어. 아버지한테 방에 갇혀서 야단맞고, 엄마는 풀어주고 그런 게 전부에요. 기억나는 게 그런 사소한 거죠.


정부에 바라는 말

<좌익들의 무분별한 활동을 막아주기 바란다>

문_ 대한민국 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으세요?
답_ 좌익들 좀 막아주세요. 북괴들을 잡아 주세요.

문_ 어떻게요? 캐나다에서는 납북자 문제나 북한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하셨나요?
답_ 그런 것을 전혀 못 했어요.

문_ 그러면 캐나다에서 그런 활동을 하실 계획이세요?
답_ 글쎄요. 여태까지는 안하고 한국에 나와서 씨름을 했지만, 이제 너무 늦지 않았어요? 이제 모르겠어요. 그래서 일을 시켜주신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내 역량에 맞는 것 뭔지 한번 해 봐야죠. 빨갱이 잡아야죠.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문_ 아버님한테 혹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해 주시겠어요?
답_ 아버지 얼마나 힘드셨어요. 못난 동운이는 엄마 뒷바라지도 못하고 더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아버지 지금이라도 살아계시면 엄마한테 연락 좀 주세요. 어머니 너무너무 고생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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