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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정규헌(증언자-정효진)
이름: 관리자
2016-12-13 16:21:48  |  조회: 1955


피랍인

생년월일: 1909년 3월 8일

출생지: 충남 예산 오리동 67번지

당시 주소: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 3가 49번지

피랍일: 1950년 8월 23일

피랍장소: 종로 6가 51-3번지

직업: ㈜ 수도주물공장 경영자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딸)

외모/성격: 가톨릭 신자로서 성격이 유했고 특허에만 전념하느라 몸이 허약했음


증언자

성명: 정효진(1932년생)

관계: 외동딸

증언성격: 간접증언


특이 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수도주물공장 경영자였던 증언자의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대한민국 최초로 특허품을 제작, 전국에 공급하였음.

- 6․25 발발 후에는 종로6가에서 한약방을 하고 있던 증언자의 큰아버지, 즉 납북자의 육촌 형의 집 다락에서 숨어 지내다가 더운 여름날에 잠시 내려왔다가 피랍됨.

- 납북되는 상황은 당시 8살이었던 큰아버지댁 막내아들이 목격하고 증언자와 증언자 어머니에게 빨리 도망가라고 함.

- 빨간 완장을 차고 온 사람 한 명과 납북자의 먼 친척동생이자 당시 공장 직원이기도 했던 사람 두 명이 와서 납북자를 끌고 감.

- 납치 후로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음. 종로구청에서 납북자 신고를 받는다고 하기에 증언자가 아버지를 제일 먼저 납북자로 신고했고, 당시 신고하는 증언자의 모습이 동아일보 신문기사에 사진으로도 났었는데 현재 피랍자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이 없음.


직업 및 활동

<피랍인은 왜정 때 한국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연탄난로로 일본 특허를 받았음. 피랍인이 경영하던 (주)수도주물공장은 당시 전국에 독자적으로 난로를 공급하는 회사였고, 600명의 직원에 3개 공장이 있는 대규모의 회사였음>

문_ 아버님의 출신학교는 어디셨죠?

답_ 옛날 동성 상업고등학교요.

문_ 당시 어떤 일을 하고 계셨어요?

답_ 그때는 특허 내느라고 집에서 많은 공부를 하셨는가 봐요. 특허 내느라고 아마 젊은 시절 대부분을 보낸 것 같아요, 왜정 때 한국 사람으로는 일본 특허 받은 게 처음이었다고 하는데, 연탄난로 특허를 냈어요.

문_ 연탄난로를 만드는 회사를 운영하신건가요?

답_ 그렇죠, ㈜ 수도주물공장. 쇠를 녹여서 난로를 만든 건데, ‘Big the stove’라고 하는 난로였습니다. 소학교부터 중학교까지니까 대단하죠. 대한민국 난로는 다 아버지가 공급했으니까요. 직원이 600여명이나 있었고 제 1,2,3 공장까지 있었지요.

문_ 회사는 어떻게 운영하게 되신 건가요?

답_ 아버지 아시는 분의 집에서 아마 점원으로 계셨을 거예요. 점원 그만두고 특허 내려고 한 몇 년 고생한 것 같아요. 나중에 그게 성공해서 공장을 운영하신 거죠. 더 계셨으면 포항제철 같은 그런 주물공장 됐겠죠.

문_ 아버님이 원래 가산이 많으셨나요?

답_ 그러니까 우리가 정화성씨 후손이거든요. 우리나라 한학자 있잖아요. 그 분 후손이라 할아버지가 한학을 하셨어요. 그래서 그다지 부자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근근이 사는 정도였지요. 그리고 아버지가 독자예요. 우리 윗대 할아버지도 독자이고. 그래서 우리가 육촌도 없고 사촌도 없어요. 손이 굉장히 귀한데 우리 대에서 끊어졌죠.

문_ 다른 사회활동 같은 건 안하셨나요?

답_ 네, 그런 건 안했고 오로지 특허 내느라고, 몸이 좀 약했었어요.

문_ 외모나 성격은 어떠셨죠?

답_ 대대로 내려오는 가톨릭 신자셨어요. 그때는 성당이 서울에 다섯 개 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주교님이 없었어요. 프랑스에서 오신 원주교님이 계셨고 또 이북에서는 신학생들이 많이 내려왔는데 아버지가 다 공부 시키고, 신부 만들고, 다섯 개 성당의 재정적인 관리를 거의 다 아버지가 한 것 같아요. 성격도 유해서 싫은 사람이 없는 것 같았어요.


납북 경위

<피랍인은 한강인도교 폭파로 인해 피난에 실패하여 종로 6가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던 피랍인의 육촌 형님 약방 다락에 피신해 지냈음. 그런데 더우니까 다락에서 내려오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잠시 내려왔다가 공장 직원이었던 지인과 인민군 한 명에게 납치됨>

문_ 어떻게 납치를 당하셨지요?

답_ 6․25가 발발하니까, 저희 공장에서도 빨갱이들이 완장 차고 설치고 다녔고, 상황이 심각한 것 같으니 피난가라는 말을 주변에서 들으셨죠. 그래서 일단 저희 세 식구가 흩어졌어요. 어머니는 큰아버지 집에 가 있었고 아버지랑 나는 한강을 건너려고 했어요. 그런데 용산에 막 폭격이 오잖아요. 방공호에 들어가지 말고 다리를 넘었어야 했는데… 방공호로 들어갔어요. 거기에서 밤을 새우고 그 다음 한강을 건너려고 하니까 다리가 끊어졌잖아요. 우리가 친척이 없으니까 갈 데가 없었어요. 할 수 없이 우리도 큰아버지 댁에 갔죠. 큰아버지, 그러니까 제 아버지의 육촌 형님은 종로6가의 개천에 있었어요. 큰아버지가 한약방을 하셨는데 아버지는 거기 약방에 계시고, 개천 하나 끼고 있는 안채 집에는 10식구가 살고 있었는데 엄마랑 저는 거기 안채에 있었어요. 아버지가 당시에 조흥은행, 상업은행이랑 거래했거든요. 그런데 마침 주말이어서 돈을 은행에 못 넣고, 아마 금고에 넣었나 봐요. 돈을 안 넣고 그 돈 갖고 우리 식구들이 산거죠. 그러다가 8월 23일에 납치되셨죠.

문_ 납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답_ 당시 약방에 다락이 있었어요. 큰아버지가 다락에 있으라고 해서 거기에 아버지가 숨어 계셨죠. 자기네들이 피땀 흘린 거 자본가들이 다 착취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숨으라고 해서 죄 없이 숨은 거예요. 고아원이니 성당이니 다 아버지가 후원하셨는데도 그런 세상이 되니까 죄인이 되는 거죠. 숨어 지내시는데 한약국이니까 노인들이 놀러 오셨는가 봐요. 그런데 그 분들이 더우니까 내려오라고, 내려오라고 계속 그러는 바람에 내려왔더래요. 내려오자마자 납치되셨대요.

문_ 납치를 직접 목격하신 건 아니시죠?

답_ 못 봤죠. 거기에 있던 막내 국진이라는 사촌 동생이 8살인데, 용산 아저씨 잡혀갔다고 그러는 거예요. 엄마랑 저는 안채에 있었는데, 저희한테 빨리 도망가라고 그러기에 우리는 뭣도 모르고 그냥 아버지 잡혀가시는 것도 못보고 도망 나왔죠.

문_ 납치를 목격하신 분이 살아 계신가요?

답_ 우리 큰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우리 8살 막내가 지금 흑석동에 살고 있어요. 용산 아저씨 빨강 완장 두른 아저씨한테 잡혀 가는 거 보고는 막 뛰어와 가지고 그 조그만 게 ‘아주머니랑 누나랑 빨리 도망가.’라고 그러니까, 큰엄마가 ‘동막에 가면 정씨 댁이 있는데 그리로 가보라.’고 그러시는 거예요. 종로6가에서 지금으로는 아마 서강인 것 같아요. 아현동 넘어서 한참 갔으니까요. 그 때 난 17살 정도였는데, 어머니랑 변장하고 수건 뒤집어쓰고 거기까지 걸어간 것 같아요

문_ 납치자가 몇 명이었다고 그러던가요?

답_ 둘이서 왔는데 하나는 최석환이라고 아버지의 먼 친척동생이에요. 그런데 걔네 집은 피난을 안가고 처갓집 가까이 원효로 파출소 옆에서 음식점을 하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심부름 시켜서 걔가 큰아버지네 집에도 드나들었는데,‘너희 형 숨어있는데 알지 않느냐?’면서 등 뒤에다가 총부리를 댔는지 어쨌는지 죽인다고 협박하니까, 대동하고 왔대요. 아버지 공장 직원이었죠.

문_ 끌려가실 때 차림새는 어떠셨어요?

답_ 그냥 와이셔츠 바람에 소매 걷었겠죠. 그리고 바지 하나 입고 그것뿐이죠. 그런데 큰아버지가 담배 주면서 이거나 가져가라고 하니까 ‘형님, 괜찮아요.’그렇게 말씀하시고 그냥 가셨다고 하더라고요.

문_ 아버님이 잡혀가면서 무슨 하신 말씀 같은 건 없으셨나요?

답_ 만났어야 말이죠. 20일 동안 아버지는 약국 다락에 계시고 저랑 엄마는 안채에 있었으니까 못 만났죠. 큰아버지께도 달리 경황이 있었겠어요. 별안간 들이닥쳐서 납치해 가는데. 

 

납치 이유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자본가였다는 이유로 납치해 갔을 것이라고 추측>

문_ 납치 상황도 모르시고, 납치 후 끌려간 장소도 모르시는 거죠?

답_ 네. 장소도 모르죠.

문_ 왜 아버님을 납치했다고 생각하시죠?

답_ 돈이 많으니까. 좌익들이 보기에는 600여명의 피땀을 빨아먹은 사람이니까.


납치 후 소식

<납북자 신고도 여러 번 하고, 피랍인의 소식을 수소문 하고자 갖은 노력을 다 하였으나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함>

문_ 납치되신 이후에 소식은 못 들으셨나요?

답_ 그런 것도 모르죠. 우리가 있었으면 그런 것을 수소문 했겠는데, 우리도 도망가야 한다고 그러니까. 죄 없이 도망 다니느라 수소문 할 경황도 없었던 거예요.

문_ 아버지를 찾아보려고 하는 노력이나 신고를 하셨어요?

답_ 우리가 종로에서 살았거든요. 로구청에서 납북자들 등록하라 그래서 제가 1월에 등록하는데 동아일보사 신문에도 났었어요. 그런데 그런 내용은 온데 간데도 없는 모양이죠? 동아일보에서도 신문에 내 모습이 찍혔어요. 내가 1번으로 등록했어요. 너무 가슴이 아픈 일이기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 찾아준다는 사람들한테 사기도 많이 당했어요. 별일 다 많이 당했습니다.

제가 많이 애를 썼어요. 우리 아버지가 여동생이 한분 계세요. 그 여동생이 미국에서 사시다가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 고모님한테 아버지 찾으러 물어보겠다고, 당시에 고모 계시던 상주까지 걸어 간 일이 있어요. 그 때는 차가 거의 안다니니까. 영등포에서부터 며칠을 걸었죠.

아버지 찾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었죠. 내 생각에는, 아버지가 많이 걸었겠어요? 못 걸으셨죠. 묶어서 끌려가는 사람들 보니까 아마 뒤쳐졌지 않을까 싶고, 뒤쳐졌으면 모두 총으로 쏴 죽였다고 그러던데. 아마 길에서 객사하신 것 같아요.

문_ 아버님 몸이 약하셔서요?

답_ 건강한 편은 아니고 그 때 마침 발을 다치신 것 같아요. 그 땐 백인제 병원하고 박병재 씨 성모병원 밖에 없었어요. 아버지가 백병원에서 퇴원하고 두 달인가 있다가 6․25가 난 것 같아요. 그래서 잘 못 걸으셨을 것 같아요. 그래서 아마 끌려가던 도중에 돌아가셨을 같아요 막바지라.


남은 가족의 생활

<피랍인의 공장을 처분한 돈을 종자돈으로 해서 두 모녀가 지금까지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해 왔음>

문_ 아버님 납치 되신 이후에 생활은 어떻게 하셨어요?

답_ 네, 9․28수복 되고 나서 어머니랑 공장 살림집에 들어와서 있었어요. 아무것도 없으니까 가톨릭 신자들 중에 석유난로 주는 사람, 냄비 갖다 주는 사람, 그릇 갖다 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1․4후퇴 때는 어머니랑 부산까지 피난 갔었죠.

공장에서는 그 입구 길가 쪽에 빵구 고치는 사람한테 세를 주었고요. 어머님이 또 갖고 계셨던 게 있어서 그걸로 둘이 산거죠. 또 공장 대지를 처분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아주 형편없이 쳐줬겠죠. 그러나 그게 큰돈이었기 때문에 그걸로 집을 사고, 모녀가 살고, 내가 대학 다니고 졸업하고, 교직 생활하고, 결혼하고 애들 삼남매 할머니가 자기 돈으로 다 길러주시고 했지요. 공장부지 처분한 그 돈을 종자돈으로 살아 왔습니다.

문_ 공장 기계와 공장 터를 파셔서 두 모녀가 생계를 이어가셨고, 장면 씨 하고 문제가 있었다고요?

답_ 당시에 장면 씨가 회사 이사였어요. 그 덕분에 대한민국의 온 미군들 고철은 다 우리 공장으로 왔어요. 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이 분이 공장을 자기네가 운영하고 우리한테 생활비를 주겠다고 그랬는데 어머니가 재판을 걸었죠. 그네들은 아무리 권력이 있어도 공장에 투자한 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이기더라고요. 이때가 수복 이후에 몇 년 지나서 그네들이 권력 잡은 때 그 때였던 것 같아요.

문_ 어머님이 아버님을 많이 생각하셨죠?

답_ 네, 저희 어머니 성함이 김가다예요. 가톨릭 신자 김 아가다 인데 ‘아’자를 빼고 가다로 호적에 올렸더라고요. 왜정때니까 네 글자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를 빼고 가다로 했더라고요. 그리워하시다가 나중에는 신장병으로 돌아가셨어요.

문_ 어머니가 아버님 이야기 많이 하셨어요?

답_ 그렇죠. 재산이 어디어디에 있다고 말만 들었지, 옛날에는 등기부등본 그런 게 없었잖아요. 구두로만 관리 했다는데 그것도 우리는 다 몰랐으니까. 사람 하나 없어지니까 온갖 게 다 없어진다고 하고 살았죠. 제가 결혼하고 애들을 낳으니까, 어머니가 당신의 고민과 그리움 그런 저런 걸 당신 손자들, 제 아들들한테 정성으로 쏟아 부으신 것 같아요. 지극 정성으로 길러 주셨지요. 돌아가신 지도 40년이 좀 안됐네요.

문_ 아버님에 대한 추억이 많으시죠? 17살 때면 기억도 많이 하실 텐데요.

답_ 그렇죠. 아버지는 제가 숙명고녀 졸업하면 프랑스 유학 시켜준다고 그랬어요. 그 때는 장면 씨하고 호형호제 하면서 지내는, 가족끼리 왕래하는 형편이었어요. 여담이지만 내가 여학교 때 맹장수술을 했는데 장면 씨 부인이 와서 만화를 읽어줄 정도로 왕래가 있었어요. 그런데 아버지 없어지니까 아무것도 아니죠. 그리고서는 그네들을 상종을 안 하고 지냈죠.

문_ 아버님이 남기신 말씀 중에 기억하시는 것 있으세요?

답_ 그 때는 여자도 앞으로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고, 성당 갈 때는 꼭 손 붙잡고 같이 가셨어요. 그걸 주위 사람들이 퍽 부러워했어요. 아들이 없으니 작은댁 보라는 아버지의 이모님이 계셨어요. 그 분이 어머니 시집살이 많이 시키셨죠. 그런데 아버님은 ‘효진이 하나면 된다. 하늘에서 주신 딸을 잘 기르면 된다.’그러셨죠.


연좌제 피해

<없었음>

문_ 혹시 연좌제 피해 같은 건 있으셨나요?

답_ 그런 것은 없었어요. 4대를 넘어오면서 다 가톨릭 신자고, 또 아버지가 성당을 다 운영하다시피 했고, 또 당시에는 교우들이 돈이 없으니까 교회를 운영하다시피 하고 그랬으니까. 사람들이 다 안타까워했죠. 아까운 사람들 그네들이 써먹지도 못하면서 왜들 잡아갔느냐고 공업인으로 저희들이 써먹었으면 그나마 나은데 그것도 아니잖아요. 중간에 죽여 버렸으면 아무것도 아니죠.


호적정리

<미정리>

문_ 아버지 호적 정리는 어떻게 하셨어요?

답_ 우리가 돌아가신 것을 못 봤으니까 사망신고를 못 했죠.지금도 실종상태로 있죠.


정부에 바라는 말

<납북자 신고를 받는다기에 굉장한 기대를 했었는데 정부에서 노력을 기울인 바가 없는 것 같음. 가족회의 활동에 대한 지원을 바람>

문_ 마지막으로 현 정부나 사회에 바라는 점 있으신가요?

답_ 나는 납북자들을 제일 처음에 등록하고 나서 굉장한 기대를 가졌어요. 그들을 위해서 정부에서 조사를 한다든가 뭔가 조치를 취하기를 바랐는데 그런 건 하나도 없고 얘기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통일원 산하단체에서 일을 많이 했어요. 아버지를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어요. 그리고 이제 60년이 지나서야 납북자 가족을 모이게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얼마 전에 가족회에서 열었던 세미나에 갔을 때 러시아 공산군이 폴란드인을 학살하는 영상을 보고, 우리나라에서도 똑같았을 거라고, 저렇게 멀쩡한 사람들 총 쏴서 죽였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너무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이렇게 가슴아파하는 것 이외에, 이제 와서 이 사업에서 어떠한 희망이 있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문_ 지금으로서는 납북 피해 사례들을 모아서 기록화 하는 것이 나중에 역사를 평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답_ 지금 아버지는 이미 100살이 넘으셨는데, 기록은 남더라도 우리는 머지않아 죽을 것 아니에요. 그래서 이사장님이 열심히 뛰시는 것 같더라고요. 외국에도 많이 다니셨고. 우리 가족회 이사장님이 잘 되기를 빌 수밖에 없죠. 이사장님을 존경합니다. 이 사업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성과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사장님을 존경합니다.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문_ 아버님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한마디 해 주시겠어요?

답_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포항제철 같은 큰 공장을 차리셨을 텐데, 그게 한스럽고 정말 너무 안타깝죠. 그 뿐이에요. 바라는 거는 그거였는데, 저렇게 삼성, 현대 같은 대기업들 잘되는 것 보면 너무 부럽고 안타깝죠. 아버지가 그 사람들 이상으로 두뇌가 명석하신 분이셨는데…. 사진에서도 보시다시피 인물이 좀 좋으세요. 왜정 때라 우리나라에서 옷도 못 입을 때인데 저렇게 입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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