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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권오성(증언자-권오기)
이름: 관리자
2016-12-13 12:32:41  |  조회: 1481


피랍인
생년월일: 1933년 10월 12일
출생지: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포동1동 405
당시 주소: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포동1동 405
피랍일: 1950년 8월 경
피랍장소: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대맥동 장자거리
직업: 학생
학력/경력: 예천중학교 졸업 후, 예천 농업고등학교 입학 준비 중
직계/부양가족: 없음
외모/성격: 키가 큰 편, 성격은 침착하고 열정적


증언자
성명: 권오기(1942년생)
관계: 동생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50년 8월경 인민군이 예천군을 지나면서 낙동강 전투에 병력을 투입하고자 예천군의 약 600여명의 학생 및 젊은이들을 의용대라는 칭호를 붙여 강제로 붙잡아 감.
- 비슷한 시기에 납치된 사촌형님이 북에 생존해 있으며,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권오성씨 역시 북한에 생존하다 사망한 것으로 밝혀짐.


“당시는 인민군이 점령해가지고 인민군 시대예요. 그래서 그 동네 책임자로 좌익사상을 가진 두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며칟날 몇 시에 어디로 모이라 연락하면 모여야 돼요. 안갈 수 없어요. 안 가게 되면 뭐 총살이니까. 그래서 아버지가 가지마라 했는데 그래도 겁이 나니까, 잡히면 죽으니까 할 수 없이 갔죠. 간 다음에 뭐 낙동강 전투에 투입됐으니까 소식을 모르죠.”


직업 및 활동

<중학교를 막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을 기다리고 있었음>

문_ 납북되신 형님이 무슨 일을 하셨나요?
답_ 예천 중학교 졸업했고, 그 당시 예천 농업 고등학교에 입학금 넣고 입학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학제가 9월부터 입학이 됐고, 9월 1일이 개학이니까 직업은 없고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갈 준비하는 학생이었죠. 그런데 8월쯤에 납치된 거지요.


납북 당시 상황

<1950년 8월경 인민군이 낙동강 전투에 필요한 인원들을 충당하기 위해 예천군의 젊은 학생과 청년들을 의용군으로 강제 동원하였으며, 피해자 역시 그러한 이유로 강제 동원되었음>

문_ 납북 당시 상황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답_ 납치 시기는 1950년 8월경으로, 형의 나이가 18살이었고 저는 9살, 초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그래서 다 기억하죠. 납치 장면을 목격하지는 않았고, 당시에 어디로 모이라는 소집 명령을 듣고서 형이 학생복을 입고 나갔던 게 기억이 나요. 그 때 우리 동네에서 한 10여명 청년들이 다 같이 나갔어요. 안 갈 수 없는 게, 북한군이 완전히 쳐들어 왔으니까 도망가다가 붙잡히기라도 하면 죽으니까 안 갈 수가 없어요. 인민군이 하라는 대로 해야죠.
그 당시는 인민군이 점령한 인민군 시대였어요. 그리고 동네 책임자로 좌익사상을 가진 두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뭐 몇 월, 몇 일, 몇 시에 어디로 모여라 연락하면 모여야 돼요. 안갈 수가 없어요. 안 가면 총살이니까. 그래서 아버지가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잡히면 죽을까 겁이 나니까 할 수 없이 갔죠. 그 다음에 낙동강전투에 투입됐으니까 소식을 모르죠.
당시에 북한군이 쳐들어 내려올 때 낙동강 전투에 투입하려고 예천군이 600명 징집됐습니다. 예천군이 낙동강으로 침입하는 통로니까 제일 많이 끌려갔습니다. 

문_ 형님을 누가 납치해 갔는지 아세요?
답_ 추측이죠. 당시 우리 동네에 좌익사상 가진 사람이 두 명 있었어요. 총 책임자는 우리 집 앞 한 200m 건너편 장터에 호두나무 집이 있었어요. 그 집에 사는 청년이 골수분자였어요. 그 사람 말이면 안들을 수가 없었어요. 또 한 명은 벼락 바위에 사는 김주한 형이었어요. 그 두 사람이 좌익이었어요. 한 동네 사니까 사람들이 다 알죠. 누구네 집에 누가 산다는 거 다 알죠. 그래서 어디로 모이라고 하면 안갈 수가 없는 거죠. 그렇게 세 차례 정도 데려갔어요. 한꺼번에 데려가진 않고.

문_ 형님께서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가신 거네요?
답_ 아버지한테는 간다고 얘기하고 가셨죠. 물론 아버지는‘가지마라 피해라.’ 하셨는데 안 갈 수 없으니까 간 거죠. 그 때 도망간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청년들은 다 갔어요. 형님 소식을 모르니까, 나중에는 죽었다고 생각했죠. 또 낙동강 전투에서 당시에 B29 100대 뜨고 포탄을 쏟아 부었기 때문에 부모님과 가족들이 형님은 전사했을 거라고 봤죠.


납치 후 소식

<납치 후에는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2008년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당시 함께 납치된 친척 형으로부터 피랍자가 평양에서 살다가 작고했다는 소식을 듣게 됨>

문_ 마을 청년들이 다 끌려갔다고 하셨는데, 살아 돌아오신 분은 없었나요?
답_ 김두호 씨하고, 김택호라고 성남에 사시는 어르신의 아들이 도망쳐왔어요. 그렇게 두 사람이 돌아왔는데, 김택호라는 분은 예천 용궁에서 차가 전복 되서 돌아가셨고 김두호씨는 밤에 인민군을 따라가다가 줄을 이탈해서 시체 끌어안고 살았대요. 영동까지 끌려갔는데, 밤에는 방향을 잘 모르는데도 상주까지 와서 낮에는 논두렁 밑에 숨고, 밤에는 걸어서 상주에서 80리 떨어져 있는 집까지 살아 돌아왔어요. 돌아와서는 교직에 몸담으셨고, 아직 살아 계세요. 

문_ 김두호 씨나 다른 분들한테 형님이 낙동강 전투에서 죽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으셨나요?
답_ 끌려가도 서로 모른대요. 같이 끌려간 것도 아니고 세 차례 걸쳐서 따로 끌려갔으니까.

문_ 그 이후에도 아무런 소식을 못 들으셨고요?
답_ 2008년 10월 이산가족 상봉 때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사촌 형님 중에 권오덕이라고 있는데, 이 형님도 북으로 끌려갔어요. 저희 형님보다 한 살 더 많아서 당시에 19살이었고 저희 이웃집에 살았었죠. 그 분도 북으로 끌려가셔서는 아들 딸 낳고 평양에서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 형님이 2008년 10월 이산가족상봉 때 북측의 100명에 뽑혀서 금강산에서 남측 가족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남측에 있는 사촌 형님, 즉 권오덕씨의 형제들인 오형제가 만났는데, 그때 우리 형님 소식을 전해 준 겁니다.
그 형님이 편지, 사진하고 주소지를 보내왔습니다. 그 사촌 형님 덕분에 저희 형님이 평양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저희 형님과 오덕 형님, 사촌끼리 어떻게 만났느냐고 물었더니 사연이 기가 막힙니다. 두 분이 평양에서 우연히 한 회사에 근무했는데 서로 몰랐던 거죠. 어느 날 점심시간에 우리 형님이 점심을 먹는데 얼핏 보니까 사촌형님 모습이 보이더래요. 그래서 확실히 알기 위해서‘고향이 어디래요?’ 물으니까 ‘고향은 왜 물어요?’ 하고 쳐다보는데 말하는 거랑 얼굴 모습이 확실히 사촌 형님인거야. 그래서 우리 형님이‘아이고, 오덕이 형님!’하셨대요. 우리 형님 애칭이 대로였는데, 사촌 형님은‘아이고, 대로야!’ 하면서 서로 끌어안고 울고 그랬대요. 그렇게 우연히 만나서 서로 알게 됐다고 합니다.

문_ 형님은 북한에서 어떤 일을 하셨나요?
답_ 회사에 있었다고 하는데, 어떤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돌아가셨다는 것만 알죠.


남은 가족의 생활

<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부모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장남을 그리워하셨음>

문_ 남은 가족들은 누구였고 어떻게 생활하셨는지요?
답_ 남은 가족은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고모, 누나, 형님 두 분과 제가 있었죠. 형님은 그 당시 아직 결혼 안 한 총각이었습니다.

문_ 부모님께서 장남인 형님을 많이 생각하셨겠네요.
답_ 평생 그랬죠. 맏아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형님이 제일 똑똑했고 공부도 많이 했죠. 그 당시 중학교 졸업했으면 꽤 대단한 거였어요. 만약에 납치 안됐으면 높은 사람이 됐을지도 모르죠. 그런 형님을 못 만나고 돌아가신 게 안타깝죠. 평생을 힘들어 하셨어요. 그래서 당시에는 점도 많이 치고, 유언비어에도 기대를 걸고 하셨죠. 

문_ 다른 두 형님이나 증언자께서는 형님에 대한 추억을 많이 가지고 계세요?
답_ 우리 형님이 중학교 다닐 때 예천까지 30 리를 걸어 다녔어요. 당시에는 차도 거의 없고, 차비도 아껴야 하니까 왕복으로 걸어 다녔죠. 학생이니까 점심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잖아요. 당시에 고지라는 게 있어 고지. 박이죠. 박이 여물면 윗부분을 잘라서 거기에다가 밥을 넣는데 콩가루, 볶은 콩가루를 묻혀요. 그럼 이게 덜 식어요. 형님이 그걸 싸 가지고 먹고 그랬던 것 좀 기억나고, 그렇게 학교 다니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연좌제 피해

<연좌제 피해 등은 없어 경찰 공무원과 교육 공무원 등에 종사할 수 있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없었나요?
답_ 없었어요. 친형이 경찰서장까지 지냈어요. 신원조회 하면 우리 동네 지서에서 요즘은 파출소 되겠죠? 거기에서 안 좋은 내용 보낸 적이 없었고. 그래서 진급도 잘 됐어요. 경찰 공무원으로 진급되고 피해 본 것은 하나도 없어요. 저도 교육공무원으로 일했는데 신원조회해서 피해 본 것은 없었습니다.  


정부에 바라는 말

<이산가족 상봉의 규모를 늘리는 노력을 해주기 바라며, 조속히 남북통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람>

문_ 현 정부에 바라는 바가 있으세요?
답_ 글쎄요. 이산가족이 천만 명이고,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들이 대략 13만 명 되는데, 1년에 한두 번 100명씩 만난다고 계산하면 다 만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앞으로는 금강산이나 개성에 면회소를 설치해서 좀 자주 만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편지 왕래도 하고, 동영상 교환도 해서 남과 북이 서로 소식을 알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빨리 남북통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문_ 형님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세요?
답_ 살아서 만나야 하는데 돌아가셨다니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낙동강 전투에서 전사하지 않고 살아서 북에 갔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인천상륙작전에 안 걸리고 빨리 올라 간 모양입니다. 평양에는 우리 같은 동창회 같은 것도 없고, 소식을 서로 모르잖아요. 그러니 오덕이 형님 만나가지고 이렇게 소식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자식들이 3남 2녀가 있고, 손자 손녀도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감사하고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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